나의 이야기

색계 -노혜경씨의 글

무거운 빈가방 2010. 10. 4. 00:30

색계 - 나 자신을  보다.

 단순 무식하다. 지식을 영화의 편수로 메워보려는 노력이 가상타. 그렇다하여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를 찾는가? 찾앗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노혜경씨의 글

 

드디어 색, 계를 보았다. 비평가들의 '과도한' 칭찬을 과도하다 생각못하고 있었던 것은, 전작 브로크백마운틴이 기대이상이었던 덕/탓일 것이다.

 

영화란 것이 반드시 보편적인 정서에 기반을 둔 보편적 이야기일 필요는 없지만, 동양의 20세기 중반 역사에서 소재를 빌려오는 영화의 경우 아무래도 정치적 알레고리화의 멍에를 피해가기 힘들다. 그것이 피해자의 자리에 서온 동양의 슬픈 본질일 것이다. 침략자, 부역자, 응징자라는 삼각구도를 발판으로 삼은 영화가 어떻게 한 개인의 사랑과 탐닉의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소재로 이렇게 영화를 만든 이안의 선택이 대만이라는 지역의 운명적 극우성의 무의식적 표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극히 개인적 취향에 충실한 이 영화가 내게는 매우 불편했다. 60년대 우리나라의 군인출신 독재자를 연상시키는 양조위의 모습도 그랬고, 그에게 육체적으로 굴복해가는 치아즈는 식민통치를 내면화한 피식민지의 민중에 대한 전도된 합리화처럼 보였고,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불구하고'의 사랑 이야기로 이 영화를 보기엔 내겐 아직도 정치가 너무 무거운 현실이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유럽이나 미국의 비평가가 있다면 참 일리있는 이야기다 싶으면서도, 한국의 비평가라면 이 영화가 위험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흡사, 김기덕의 영화 [나쁜 남자]가 여성의 관점에서는 포르노 폭력물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부당한 영화였던 것처럼. [나쁜 남자]가 대한민국의 복잡한 계급적 현실에 대한 잘 짜여진 보고서란 점에 대해서 당분간 눈을 감아야 할 필요성은, 김기덕의 리얼한 보고가 영화감독 김기덕이 불특정다수의 여성들에게 가하는 아무것도 아닌 남자 김기덕을 위한 무차별적 복수였기 때문이다.

 

좋았던 것은 섹스장면. 그러나 이 한 마디의 물음에 대해 당신이 어떤 답을 할 것인가에 따라 이 영화의 평가는 갈릴 거다, 이명박 광신도와 섹스할 수 있니?(물론 영화에서는 안전장치가 있다. 치아즈는 '이'를 암살할 계획을 지니고 그에게 접근한 스파이였다고 하는. 그리고 스파이가 적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다. 다만 그 매개를 이 영화에서는 지독한 섹스로 설정한 것이 이안다울 뿐.)

 

영화를 보고난 다음, 나는 한 가지에는 공감을 했다. 정치의식이 생각보다 약한 우파적 여성이 민족의 위기 앞에서 저항조직에 뛰어들었다면 치아즈처럼 나이브하게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영화 다보고 난 나의 소감은, 지극히 특수하고 미시적으로 리얼한, 그러나 리얼리티는 없는 영화란 것,. 언제나 실화는 허구보다 환상적인 법이라, 리얼리티는 실제 사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이 인과와 목적과 보편성을 얻어 재현될 때 발생하는 것이라, 리얼리티가 뭔가에 대한 반면교사적 영화였다. 어쨌든 궁금해진 것--이안은 이 영화를 실화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왜 이 사건에 흥미를 느꼈을까.

 

실화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어떤 시대정신이나 보편적 요구를 반영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적과 흑의 줄리앙 쏘렐도 실제 사건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스땅달은 시장부인을 살해한 한 청년의 재판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쏘렐은 변혁기의 프랑스에서 신분의 질곡을 뛰어넘고자 노력하다가 좌절하는 청년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고, 그를 통해 사적 사랑의 양태가 공적 의미를 획득했다. 그렇다면 색.계에는 어떤 공적 의미가 있나?  표현된 내용만으로 보자면, 서툴고 엉성한 대학생 운동권의 낭만적 저항이 있을 뿐이고, 그것도 민족반역자를 향한, 그들끼리의 전쟁이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일본은 막연한 적이고, 이 청년들의 저항은 극히 개인적 분노의 차원을 넘은 어떤 역사적 의미도 없다. 중국을 지켜주세요, 이 한 마디면 다.

 

---2007/12/30 씀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친일성이 강한 여성 소설가의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탕웨이가 이 작품으로 중국에서 출연을 못하게 된 것은 중국인들의 역사의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실감할 수 있음에 반해, 중국인 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을 겪은 한국인의 색계에 대한 태도는 불편을 넘어 허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이 출연한 양조위는 여전히 중국의 영웅인 것을 보면 극도의 성차별에 대한 현주소도 같이 느낍니다. 예술이 현실과 동떨어진 적이 없음을 볼 때 유태인외의 어떤 학살에 대해 무심한 세계의 모습(특히 일본에 대한 미국 중심의 관용)도 같이 보여 매우 가슴 아팠더랬습니다.

 

권경애

 

색계에 대한 인상은 불편함까지는 아니여도.매우 복잡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의 치기어리고 어리숙했던 학생운동시절을 비추어보면 나름의 리얼리티도 획득하고 있는 영화라고도 봐요. 혁명을 연극처럼 이해하던 동료들은 치아즈를 양조위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훈련(!) 시키지요. 그녀의 성은 처음부터 양조위의 암살를 위해 준비되었던 도구였지요. 치아즈가 양조위에 몸으로 굴복되어가고 결국 사랑에 빠지는 것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어디선가 치아즈의 마지막 배신은 자신의 성을 혁명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동료들에 대한 복수라고 평한 것을 보았어요.

치아즈 역시 강요로 수락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존재' 그자체가 아니라 "당위"로 선택한 결정이 삶에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저는 이해할 것 같아요.

20살 어릴적 우리들 역시 아직 삶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당하기 힘든 역사적 책임과 '당위'로 한 결정들로 자신의 삶이 왜곡되었던 상흔들을 여기저기 안고 살지요...

 

 Rebecca Kim

경애샘/ 보는 사람을 그렇게 '착잡'하게 만드는 데 모든 위대한 예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느끼신 거 엇비슷하게 저도 느꼈었어요. 거기에다 '색'에 대해서도, '계'에 대해서도 한번 곰곰 생각하게 만드는 이안 특유의 저 동서양을 아우르는 깊이! 동지들이 맨 처음 '침투용' 연줄로 쓰기위해 그들 중 한사람의 친구를 찾아가던 장면, 혹 기억나세요? 어둑한 밤이고, 거기 사창가 여자들이 한 건물 이층에 보일락말락 있는데, 그걸... 양치아즈가 멀리서 유심히 보는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전 그걸 영화를 3번째 봤을 때야 알아봤는데, 결국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지요. 전 '색'은 결국 '자아'가 아닌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동양적인 사유에서는 그게 현실이 아니라고(=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또는 현실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안은 여기에 정신분석적인 차원을 하나 덧보태는 듯 했어요. '자아'는 마치 건물 골조와 같아서, 사회적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절대 '그대로 다 드러낼 수 없는' 어떤 거 아닌가하는. 맨 마지막에 동지들이 다같이 끌려가 마주했던 그 죽음의 골짜기는 아마 '완전히 실패해 밖으로 드러나버린 자아'가 아닌가 하는. 그러니 우리는 보호하기 위해, 아니 표현하고 계속 '살게 하기 위해' 그 자아를 몇 겹 페르소나로 둘둘 싸는데, 그게 '계'가 아닌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니 이안은 색하고 계를 서로 그리 동떨어진 것으로 봤던 거 같지 않아요. 육신가진 것들이 처한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죽을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무대 ㅡ '혁명'보다 그걸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어디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지점에서부터 '정치'를 다시 한번 풀어보게 만들더군요.

 

 

노혜경

권변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저의 색.계에 대한 평가는 약간 고의적으로 경직된 데가 있지요.

"몸으로 굴복되어 가고 결국 사랑에 빠지다" -- 이것이 이안이 추구한 진정한 주제일 거예요. 그것이 지나치게 정곡을 찌르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존재' 그자체가 아니라 "당위"로 선택한 결정이 삶에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의 문제는 리얼리스트로서 이안의 출중한 능력덕분에 따라온 양념이구요.

하지만, 동양권 감독의 세계무대에서의... 영화를 좀더 탈식민주의적 정치성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전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