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인용식탁

무거운 빈가방 2010. 3. 21. 16:19

 

 

10-03-20 4인용식탁(씨네마테크 서울)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면 무섭다 한번씩 떠오르는 장면 때문에. 그래서 잘안본다. 볼생각도 하지 않았던 4인용식탁은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에 실린 덕분으로 보게 되었다.

 

김의 전쟁에서 김희로는 의연한 한국인으로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 믿었다. 그러나 한국에온 뒤 그가 저지런 살인과 시체 유기를 볼 때 그가 일본에서 행한 인질극은 일본 내의 한인 차별에 대한 정당한 방어의 발로 보다는 개인적 원한 속에서 야쿠자를 살해한 뒤 일으킨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일본의 한인 차별과 멸시에 대한 기본 바탕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전히 자행되고 있지만. 그렇다. 우린 김희로의 영화 ‘김의 전쟁’을 처절하게 기억해야만 한다. 그의 영화와 현실에서 그가 일으킨 살인과 사체유기를!

     <김의 전쟁> 중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영화계에도 이것에 버금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정권이 바뀐 이 후 영화계에도 4인용식탁이 놓인 모냥 괴기감이 감돈다. 어느날 학교가 사라지고, 영화관이 없어지려고 한다.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이 그들의 해체에 대한 항의와 호소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정상화를 촉구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중심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그들의 데뷔작과 만나다’를 기획하였다. 그 덕분으로 영화 몇 편 보았다. 오늘은 <4인용식탁>과 <처녀들의 저녁식사>이다.

 

감독 이수연

출연 박신양 (정원 역), 전지현 (연 역), 유선 (희은 역), 김여진 (문정숙 역), 정욱 (강 목사 역)

 

 현재는  과거와 엮어져 잇는 모양이다. 비록 기억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언제나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두는 경우는 많다. ‘프로이드’의 영향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가?

4인용식탁은 곧 결혼은 앞둔 정원의 애인 유선이 정원의 아파트에 가져다 둔 멋진 식탁이다.

정원은 리모델링을 전무으로 하는 업자(우린 이렇게 부른다)이고 유선은 조명 전문가다.

연은 길가다가도 쓰러져 잠들듯이 정신을 잃는 기면증 환자이다. 신내린 듯 사람의 과거를 보는 것은 그녀의 주특기다.

 

정원은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계기로 죽은 아이가 4인용 식탁에 앉아있는 환영에 시달린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 환영을 볼 수 잇는 연을 만나는 것은 이 영화의 필연이다.

 

아파트에  자리한 것은 식탁이고 정원과 희은은  모두다 방 또는 사무실이란 좁은 공간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신경정신과를 리모델링하는 정원은 이 병원의 손님인 ‘연’과 만나게 된다. 처음엔 매우 약한 전파처럼.

둘의 공통점은 목적과는 관계없지만 신경정신과라는 공통된 공간을 자리하는 것. 그리고 4인용 식탁의 아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과거를 궁금(대체로 악몽 때문에 그렇다) 해 하는 사람들에게 영매 같은 존재인 ‘연’과 한고리를 잡고있는 두사람 ‘정원’과 문정숙(김여진)

 

 영화는 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와 연결된 자신을 알려하는 사람과 과거를 알게 되므로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준다.

‘연’은 말한다. ‘사람들은 겪는다하여 다 믿는 것이 아니다’고 그러면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믿는다’라고. 어쩌면 이 대사가 감독이 의도하는 것을 함축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진실은 대체로 불편하다. 비록 궁금하지만 회피하고픈 마음들이 더 크다.

 

 참 많이 죽이고 죽는다. 어른 넷, 아이 넷, 얘기 둘 도합 열이다 더 있나? 용산참사가 따로 없다,

미국에는 아이에 대한 죽음이나 죽임은 엄격한 규제가 있다한다. 물론 이것은 엄연한 현실도피일수도 있다. 현실은 죽고 죽이는 것이 어른 보다 아이들이 더 많은데(특정 사건인 용산참사 같은 경우는 다르지만) 영화에선 규제한다는 것은 사전규제적인 성격도 강하다 할 순 있겠다. 그렇다하더라도 끔찍하다. 아이는 직접적인 것 보다 다른 형태로 처리되었으면 좋겠다. 비록 현실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호텔에서 나가는 애인과 어느 여인을 본 희은은 사실상 정원과 결별을 고한다. 그 장면이 재미있다. 우산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도 주제를 약간은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비가 내리길 기도하는 교회의 목회자들. 함께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고 비가 왔다. 그런데 우산 들고 온 놈은 아이 한명 뿐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늘 긴장하게 만든다. 살인에 관한 것이든 심리에 관한 것이던. 4인용 식탁은 예상과는 달리 호러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섭고 떨린다. 더 무서운 것은 영화가 마치고 난 뒤다. 영화를 비교적 앞에서 보는데 마친 뒤 일어서서 뒤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실 혼자 봤다, 약 300석 가까이되는 씨네마테크인데 이거 뒷골이 송연하다. ‘4인용 극장’도 아닌 영화 보다 더 무서운 ‘300인용 영화관’의 주인공이 된 듯, 나하고 300인의 시신(눈에는 보이지 않지만)이 함께 본 것이다.

 

 국제교류문화센터에 지금 ‘슈피겔 표지전’을 하고 있다. 현대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표지들인데 그 중 몇 개의 표지가 ‘프로이드의 심리는 지금까지 너무 과장되어 왔다.’는 것들이 보인다. 난 이런 내용을 믿는다. 꿈이 가지는 한계가 너무 뚜렷한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연결고리를 우짜던동 찾고 싶은 것이다. 영화의 주 소재꺼리 중 프로이드가 약방의 감초 아니겠나? 이제는 다른 것을 찾아야할 때인 듯하다. 물론 ‘4인용 식탁’은 참으로 볼 만하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와 사람간의 맺음 등이 참 매끄러우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현 세태를 다른 형태로 꾸짖고 있다. 좋다. 너무 잘봤다. 그래도 이제는 ‘프로이드식’이아니라 다른 형식을 보고 싶다.

 

 <밑에 깔려있는 이가 프로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