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닉스: 과거,현재, 미래 나, 나 아닌 나, 진짜 나. 내가 나를 찾아가는 스릴러.
무거운 빈가방
2021. 9. 9. 14:08
피닉스 Phoenix , 2014

그러고 보니 피닉스 본지 오래되었네..
<영화의 전당>이 프리미엄 회원들에게 게약을 위반하며 엄청난 손실을 입힌데 화가 나서 탈퇴한 이후 영화를 거의 안봤지. 안보다 보니 보고도 본지 모르고 넘어갔네. ..긋참.
크리스티안 펫졸트 영화는 이번이 4번째다
<바바라>(2013), <옐라>(2007), <운디네>(2020) 이후 이번에 <피닉스>
앞에 본 영화 3개는 사람 이름이 제목이다.
<피닉스>도 주인공 “넬리”를 제목으로 해도 아무 이상이 없을 것 같은데, 장소를 제목으로 했다.
<피닉스>에서는 그만큼 술집인 이곳이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이며 이미지인 동시에 의미를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감독의 영화 속 여주인공의 이름들이 모두 다 참 간단하네. 이름 자수가 3자를 넘기지 않는다. 이 간단한 이름의 주인공들은 어마무시한 심리적 상태를 몸으로 뿌려야 한다. 그런 덕분으로 감독의 영화들은 늘 주목을 받는 것 같다. 작년에 본 <운디네>의 경우도 현재와 과거 , 현실과 신화를 같이 표현해 내는 높은 수준의 극이었다.
옛날 <존 무어>의 모험영화 <피닉스>(Flight of the Phoenix, 2004)도 떠오른다.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탑승객들이 사막과 무어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고, 동강난 비행기를 재조립하여 하늘로 오르는 기적의 영화.

그래 피닉스는 이런 죽지 않는 불사조다.
펫졸트의 <피닉스>도 단순한 술집 피닉스가 아니라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과 마찬가지인 ‘넬리’의 불사조 같은 이야기이다.

얼굴을 심하게 다쳐 붕대를 칭칭감고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내면서 국경을 넘는 첫 장면, 어둠과 안개가 짙게 깔리고 경비를 서는 미군은 못믿겠다고 붕대를 풀어 보라 한다.
붕대를 풀면 자신의 안고 있는 고통을 오롯이 드러내게 될 것이고, 이것은 나중 연기하든 가면(붕대)을 벗고 진짜의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들하고도 이미지가 통한다.
<피닉스>는 아우슈비트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여성 넬리의 이야기다.
녤리는 유대인이 아닌데 유대인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친구는 이젠 운명적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팔레스타인을 침탈하여 만든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웟다)으로 가자고 한다. 그것만이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넬리는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만나 여기서 살고 싶다.
전쟁 때문에 헤어졌지 다른 문제가 있나?
그래서 <피닉스>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는데, 아뿔사! 남편은 성형을 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웃기게도 남편은 자신에게 ‘죽은 아내’와 많이 닮았으니 그녀를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그녀 소유의 많은 재산을 찾게되고, 각자 나누자고.......

재밌지 않나?
내가 나를 연기한다?
보통 2중 인격이나 다중인격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여기선 그냥 내가 나를 연기하는 거다.
친구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랑을 되찾으려는 녤리가 안타깝다.
남편은 유대인인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인 녤리가 유대인인 양 고발하고 자신은 살아남는다. 게다가 살기 위해 아내가 끌려간 이후 이혼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녤리에게 친구는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
‘녤리’는 남편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할 거라 믿기에 남편의 사랑을 끝까지 확인해 보고 싶다.
그래서 자신을 연기한다.
전쟁의 상처로 말투와 걸음걸이 등 많이 달라진 것을 남편의 연기지도로 다시 회복해 간다.
자신을 못알아보는 남편, 자신을 알아보는 옛날 집사.
자신의 옛집을 찾았을 때, 가정부(?)는 바로 알아보고 놀라고, 남편인 집사(?)는 인사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왜 그럴까?
유대인으로 고발되 죽은 줄 알았으니 이제 이 집은 자신들 소유나 마찬가지이다가 돌아왔으니 빼앗기게 된다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설명이 없어도 당황해 하는 표정만으로도 유추가 가능하다.
묘하다.
죽음을 반기는 사람들과 슬퍼하는 사람들.
전쟁은 천사와 악마를 뒤섞게 만들고 정의로움이나 선함도 사라지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도 정치도 사회도 다 그리되었삣다.
보다 빨리 더 닮기를 제촉하는 남편
자신을 연기하면서 점점 과거의 진실에 다가가는 넬리.
이런 속에서 갈망과 갈등을 주인공 <나나 호스>는 약간의 표정으로 다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배우들 이름도 심플하네.. 나나 호스... 폴라 비어...긋참.)
녤리는 엣날 끌려갔던 곳을 가보자고 남편을 조르고 ,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델꼬 간다.(남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장소가 궁금한 듯이 연기하며)
여기서 드디어 엣날 자신이 처했던 상황, 당황스럼 고통과 진실을 만난다.
이제 연기를 완성하는 날,
자신이 살았다는 소식을 주변 친구들에게 편지로 널리 알리고
친구들은 기차역에서 기다린다.
친구들에게 살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 이제 재산은 자연스럽게 가져오면 된다.
녤리는 엣날 자신이 즐겨 입었던 옷을 입고
기차 연기 가득한 정거장을 뚫고 나타난다.
남편도 놀라고 친구들도 놀란다.(친구들도 돈주고 매수 한 느낌, 그래서 모두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 놀라는 듯)

찾아보니 본 뒤 적은 간단 메모도 있네. 같이 올린다.
과거의 그리움 삶을 돌이키려는 여성의 이야기..
광란의 죽음에서 겨우 살아남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돌아가려는 여인
남편은 아내를 닮은 여자를 이용하여 죽은 줄 알았던 아내의 재산을 자기 앞으로 하려고 계획을 꾸미고.
과거로 돌아가는 여자와 미래 따뜻한 삶을 영위하려는 남자의 교차점은 어디일까?
언제쯤이면 내가 살아있다 나다 라고 하고
아. 살아있었네 할 것인가
마치 그 지점을 찾아가는 한편의 스릴러가 된 피닉스
영화가 부리는 마술은 분명 알아볼 것 같은데 몰라해도 허용해 준다.
우린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올라 감독과 배우가 협연하여 교묘히 속이는 기술에 편승한다.
이 줄 위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전쟁의 광기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자와, 살아남기 위해 남을 파는 자, 고발자 또는 배반자는 어떤 자기합리화로 살아갈까?
그 와중에 희생된 수많은 목숨은 어떤 형태로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까?
해원..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억울한 죽음들을 푸는 행위조차 범죄로 몰아가기도 했고,
지금도 과거에 집착하는 망령으로 내몰리기도 하는 비극,
지금도 많은 국회의원을 가진 , 대통령도 배출한 정당이 왜놈들의 앞잽이 노릇을 하고 잇으니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릴 때도 종종 있다.
독일은 나름 해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독일 영화는 마음 아프지만 편한 경우도 많다.
독일의 현재를 두고 상처와 치유, 자유에 대한 갈구를 많이 그렸던 감독은 <피닉스>에선 다른 형태의 현재를 파헤친다.
주인공은 현재의 배우이고 과거의 아내이다.2중 구조.......(요까지 적혀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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