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인 시위
무거운 빈가방
2021. 10. 1. 00:28
1인 시위
동일이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이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증서>를 받았는데
정부는 증서만 주고 희생에 대한 보상은 안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서울 경기 등 몇 개 지방자치에서는 조례를 만들어 보상을 하고 있단다.
경북 대구는 긁힘이 장악하여 가능성이 0이란다.
부산은 일정 가능하니 시장에게 보상을 하라는 일인시위를 해야겠단다.
난 금요일 배정 받았다.
시간은 1시간~1시간 20분 정도 점심시간 사람 이동이 많으니 공무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피켓을 든다는 것.
난, 과거를 많이 잊었다. 직장은 떠난 지도 오래되어 관계된 일을 전혀 안했기 때문이고, 관련자들과 교류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잠시 몸담고 투쟁하고 했던 것은 그 시대의 매우 작은 역할로만 상정하고 덮어버린 셈이다.
이 일 한달 전에 윤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의 투쟁을 백서로 만드니, 중요 투쟁의 하나인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좀 하자고.
박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을 좀 적어서 톡으로 보내달라고..
난 잘나지 않는 기억을 쥐어짜보지만 진척이 없다. 달라붙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안된다.
당시 학생들에게 연락하여 자기 활동 기억을 좀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몸 담았던 곳은 학생들의 투쟁이 가장 컸고 길었다.
당시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지킨다는 의지로 학교 측과 사회에 대해 싸웠다. 그러나 그들을 억압하는 관리자들과 선생들도 많고 친구들 간에도 나눠지니 힘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거다.
학생회 간부들은 사퇴하라는 억압을 늘받고 나중엔 결국 징계도 받았다.
투쟁하는 중에는 다른 것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학업에도 많은 방해가 되었을 것이니 대부분 재수를 했다.
나도 종종 나의 삶에 후회가 많은데 아이들은 더 그랬을 것 같다.
이리 저리 아이들 전번을 찾아가고 통화를 하고 만나면서
이들이 가졌던 아픔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난 당시 투쟁에만 눈이 멀어 사람 하나하나를 못 본 거다.
모두를 살피긴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싸워야 한다는 당위 만큼이나 아플 것이라는 현실에도 눈이 갓어야 했다. 다독이고 격려가 필요한 시간에 난 그곳에 없었고, 눈에 보이 지 않았으니 별 갈등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