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전시

얼숲 - 조양익님 '엘 그레코의 성화 이야기'

무거운 빈가방 2011. 5. 30. 10:55

아직 100번째가 남았다. 조양익님의 쉽 없는 그림 이야기는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겐 너무도 큰 도움이 된다. 많은 것을 보지 못했지만 나머지 그의 글과 그림을 조만간 다 읽어야겠다.

 

엘 그레코의 성화 이야기 - 아흔아홉

작성: 조양익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오후 10:44

종교 특히 기독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중세이전부터 많은 유럽 화가들의 주요 관심사였고 그 수도 많습니다. 그중에도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의 성화나 기독교 서적의 성화 중에 깊은 명암과 색채, 길쭉한 신체묘사로 신비롭고 역동적이기까지 하여 눈이 뜨이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체 부위 중에 세 번째 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을 붙여서 그린 점이 독특해서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스페인의 3대 화가 중의 하나라고 하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작품들입니다. 보통 베네치아 풍의 미술을 기초로 한 매너리즘(Mannerism, Manierisme 마니에리슴) 양식이라고 하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그런 분류와는 다른 요소들이 보입니다. (Christ Carrying the Cross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1580s Oil on canvas, 105 x 79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그의 "엘 그레코"란 호칭도 그의 인생 이력이 담긴 독특한 별명인데 “El”은 스페인어 정관사이고 “Greco”는 이탈리아어로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러니 엘 그레코는 말 그대로 ‘그리스인’이란 뜻으로 의미에서는 그의 조국이 들어있고 문자에는 그가 활동한 두 나라가 들어있으니 그와 관련되는 세 나라가 다 표현되는 특별한 별명입니다. 엘 그레코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불리지만 그가 그림에 남긴 서명은 그 본명인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었고, 그것도 그의 작품에 늘 그리스 문자로 “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라고 서명해 그리스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출생년도도 정확하지 않고 행적도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들을 전해보겠습니다.

 

Portrait of An Old Man (presumed self-portrait of El Greco) 1595-1600 Oil on canvas, 53 x 47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그리스지만 당시는 베네치아 지배하에 있었으며 ‘칸디아’로 불리던 크레타(Creta) 섬입니다. 그는 크레타 섬에서 비잔틴 양식의 이콘(icon)화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크레타 섬에서의 그의 활동은 1983년에 발견된 아래의 <성모의 죽음 The Dormition of the Virgin>을 통하여 알아볼 수 있습니다. 수백 년간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누구의 작품인줄 몰랐다가 그림의 촛대에 있는 서명을 찾아내어 엘 그레코의 작품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보통 이런 그림을 이콘(icon)화라고 부르는데 일종의 규격화된 종교화입니다.

 

<성모의 죽음 The Dormition of the Virgin>

The Dormition of the Virgin 1565-1566(before 1567) Tempera and gold on panel 61.4 × 45 cm Holy Cathedral of the Dormition of the Virgin, Hermoupolis

 

이 그림의 주제는 사도들 사이에서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당시 그리스 정교의 미술에서 많이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인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하여 비자연적인 색채와 인물의 탈감정적인 표정 처리가 바로 비잔틴 양식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엘 그레코도 그런 당시의 규범에 따라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의 자연스런 몸짓이라든가 천사의 유연한 묘사는 자연주의적인 요소이고 그가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반라의 여인이 받치는 촛대는 고전주의 미술에서 많이 등장하던 것으로 그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촛대에 그의 서명이 들어 있는데 당시 이런 작품에는 서명을 남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어서 그가 화가로서 자부심도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 섬을 떠나 더 많은 것을 배우고 활동하기 위하여 당시 크레타(칸디아)를 통치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이주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세 이후인 1560~66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 - 1576), 틴토레토(Tintoretto, 1518? -1594),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 -1588)같은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시기로 엘 그레코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570년 11월 16일에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Guilio Clovio)가 추기경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에게 쓴 편지에는 '티치아노의 제자로 칸디아에서 온 젊은이'를 위해 파르네세 궁(宮)에 숙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 시기에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갔으며 티치아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티치아노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배운 것인지 아니면 교류만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엘 그레코가 이후 활동에서 계속 경의를 표했던 화가가 티치아노인 것을 확실합니다.

 

<소경을 치료하는 그리스도>

Christ Healing the Blind c. 1567 Oil on panel, 65.5 x 84 cm Gemaldegalerie, Dresden

 

<소경을 치료하는 그리스도>는 그가 평생을 통해 여러 번 그렸던 주제로, 1567년의 작품을 보면 후에 그린 그림에 비해 혼란스럽고 부정확하고 번잡한 느낌입니다.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보낸 시기는 그가 크레타에서 배운 이콘(icon)화에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영향을 받은 16세기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화해가며 그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던 시기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The Modena Triptych (front panels) 1568 Tempera on panel, 37 x 23,8 cm (central), 24 x 18 cm (side panels) Galleria Estense, Modena 세폭 성화 앞면

Annunciation 1568 Tempera on panel, 24 x 18 cm Galleria Estense, Modena

The Modena Triptych (front panels) 1568 Tempera on panel, 37 x 23,8 cm (central), 24 x 18 cm (side panels) Galleria Estense, Modena 세폭 성화 뒷면

Baptism of Christ 1568 Tempera on panel, 24 x 18 cm Galleria Estense, Modena

The Last Supper c. 1568 Oil on panel, 43 x 52 cm Pinacoteca Nazionale, Bologna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파르네제 궁(宮)에 머무는 동안 그림 외에도 그는 이탈리아의 지성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특히 추기경의 사서와 친해서 많은 서적을 접하고 학문적 소양을 높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572년 9월 18일 기록에 의하면 '도미니코 그레코(Dominico Greco)'라는 사람이 로마의 성 루가 동업조합에 조합비를 납부했다는 것으로 보아 로마에서 활동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575~76년경 베네치아를 거쳐서 1577년에 스페인으로 다시 이주하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엘 그레코가 교황에게 시스틴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위에 자신이 더 뛰어난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을 했다가 다른 이탈리아 화가들의 미움을 사서 도망쳤다고 하는 데 사실 관계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베네치아 양식이 중심인 그의 화풍과 그리스 예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로마의 화가들과 마찰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로마에는 화가들이 넘쳐서 이탈리아 화가들도 일거리가 없어서 이탈리아를 벗어날 정도였다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인 엘 그레코가 버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

The Purification of the Temple 1571-76 Oil on canvas, 117 x 150 cm Institute of Arts, Minneapolis

 

<초상화>

Giulio Clovio 1571-72 Oil on canvas, 58 x 86 cm 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 Naples

Portrait of a Man c. 1575 Oil on canvas, 116 x 98 cm Statens Museum for Kunst, Copenhagen

 

엘 그레코가 1570년대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그린 작품은 대체로 16세기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을 충실합니다. 배경을 이루는 건축물을 강조하면서도 그 공간속에 인물을 잘 배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들은 그가 비범한 초상화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77년, 30대 중반(36살 정도)의 엘 그레코는 마드리드를 거쳐 톨레도에 도착했습니다. 톨레도는 지금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도시이지만, 1561년에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왕궁을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의 수도였습니다. 자연히 스페인의 문화와 지식,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가 도착했을 당시만 해도 스페인은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고, 이탈리아와 함께 16세기 유럽을 휩쓸고 있던 종교개혁의 바람과도 무관한 나라였습니다. 더구나 1563년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새 왕궁이자 수도원인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정식 명칭은 Real Monasterio de San Lorenzo de El Escorial, the Royal Monastery of San Lorenzo El Real) 공사는 당시 유럽 최대의 건축 공사였고 많은 미술 수요가 있었습니다. 엘 그레코 또한 거기에 참여하고 궁정화가가 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어를 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스페인에는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힘들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파르네제 궁(宮)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루이스 데 카스티야’란 스페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엘 그레코의 유언집행인으로 지명된 것으로 보아 스페인 생활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의 형인 ‘디에고 데 카스티야’은 엘 그레코의 스페인에서의 첫 작품을 주문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산토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중앙 제단>과 그 구성 작품들

High Altar 1577-79 Oil on canvas Santo Domingo el Antiguo, Toledo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서 받은 첫 번째 주문이라고 알려진 작품은 산토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중앙 제단과 2개의 측면 제단을 위한 제단화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은 제단에 여러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림을 주문받아 그렸지만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큰 작품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베네치아 건축 양식을 연상시키는 제단 틀의 설계도 그가 맡았으며, 중앙 제단에 그린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 <삼위일체The Trinity> 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제까지 그가 수련해왔던 모든 재능이 발휘되어 엘 그레코의 독특한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작품들로 평가받으며 그의 예술인생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아래 몇 점의 작품이 이 제단을 구성하고 있는 그림들입니다.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577-79 Oil on canvas, 401 x 229 cm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은 물감을 칠하는 기법과 흰색 강조 부분을 사용하는 기법은 여전히 베네치아 양식을 따른 것이지만 강렬한 색채와 대조는 엘 그레코 특유의 양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The Trinity 1577 Oil on canvas, 300 x 179 cm Museo del Prado, Madrid

제단 제일 윗부분의 그림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처럼 힘차게 그린 것으로 보아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St. John the Evangelist 1577-79 Oil on canvas, 212 x 78 cm Santo Domingo el Antiguo, Toledo

St. John the Baptist 1577-79 Oil on canvas, 212 x 78 cm Santo Domingo el Antiguo, Toledo

The Resurrection 1577-79 Oil on canvas, 210 x 128 cm Church of Santo Domingo el Antiguo, Toledo

측면 제단의 〈그리스도의 부활 Resurrection〉에서도 군인들의 자세들을 볼 때 그가 미켈란젤로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토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중앙 제단>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그림으로 <El Espolio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에서는 엘 그레코만의 양식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El Espolio>

El Espolio (The spoliation, Exspolĭum, Christ Stripped of His Garments, The Disrobing of Christ) 1577-1579 Oil on canvas, 285 x 173 cm Sacristy of the Cathedral of Toledo, Toledo, Spain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El Espolio>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군인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으로 복음서에는 특별히 기록된 순간은 아니지만 비잔틴 미술에 등장한 것을 엘 그레코가 다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서에는 군인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누가 가져갈 것인지 제비뽑기를 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그림은 그 전 장면으로 화면 중앙의 그리스도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옷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림의 밑 부분에는 십자가의 못자리에 미리 구멍을 내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세 명의 마리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옆에는 특별히 갑옷을 차려입은 군인이 앞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데 그 군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개종을 했다는 로마군의 백부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눈물이 어린 눈으로 하늘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엘 그레코가 창안한 것으로 다른 그림에도 이와 비슷한 묘사가 있습니다. 또한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엘 그레코의 경향은 이 시기부터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림을 주문한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은 군중의 머리가 그리스도보다 위에 있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고 복음서와는 달리 세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그 시기 스페인에서는 그림이 선불제가 아니라 작품이 완성된 후에 화가와 주문자가 그림 값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 가격을 놓고 주문자는 엘 그레코가 원하는 가격의 사분의 일 가격을 제시했고, 둘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엘 그레코는 결국 자신의 원하는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았고 교회와 사이도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 외에도 엘 그레코는 이런 비슷한 다툼이 많았는데 그는 화가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주문자의 뜻대로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창의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신념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문자가 수정을 요구하더라도 응하지 않고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예술가의 자존심과 자유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엘 그레코에게도 기다리던 궁정화가의 길이 열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와는 다툼이 있었지만 당시 권력자인 펠리페 2세의 주문을 받은 것입니다. 엘 그레코는 펠리페 2세로부터 주문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함 The Adoration of the Name of Jesus>과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Martyrdom of St. Maurice〉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함 The Adoration of the Name of Jesus>

The Adoration of the Name of Jesus 1578-80 Oil and tempera on pine panel, 55,1 x 33,8 cm (excluding the painted black border) National Gallery, London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함 The Adoration of the Name of Jesus>은 몇 번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이 그림은 빌립보서 2장 9-10절의 내용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함>으로 불렸습니다. 1857년에 빈센트 폴레로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얼굴이 펠리페 2세이기 때문에 〈펠리페 2세의 꿈 Dream of Philip Ⅱ〉로 불리는 것이 맞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엘 그레코는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종 현실 세계의 얼굴을 그려 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미술사학자인 안토니 블런트는 이 그림이 16세기 최후의 십자군 전쟁이었던 레판토 해전의 오스트리아 돈 후안 장군을 추모하는 내용이므로 〈신성동맹 우의화 Allegory of The Holy League〉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같은 박물관에 있는 티치아노의 그림 제목인 <The Trinity in Glory(1552-1554)>과 비교하여 <엘 그레코의 영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 Maurice>

The Martyrdom of St Maurice 1580-81 Oil on canvas, 448 x 301 cm Chapter House, Monasterio de San Lorenzo, El Escorial

 

그림의 주인공인 마우리티우스는 3세기 초 로마에서 이집트 출신 군인들의 통솔자로 그 부대의 군인들이 모두 기독교도로 이교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다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 순교 장면을 묘사하면서 참수형 장면을 화면 왼쪽에 배치하고, 장군과 군인들이 토론하고 있는 장면을 집어넣었습니다. 순교가 갖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순교에 대한 토론 장면을 넣음으로써 순교의 정신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의 갑옷도 당시 스페인의 것이고 인물도 당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엘 그레코는 종교화에 현실의 이미지를 넣어 현실과 결부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것은 주문자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그림 값을 지불하고 작품을 가져가긴 했으나 원래 설치하고자 했던 엘에스코리알의 예배실 제단에 걸지 않았고 그 제단화는 다른 화가에게 또 의뢰하였습니다. 20세기 같으면 적극적인 사고와 대담한 색채사용으로 호평을 받았을 작품이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큰 교회와도 다툼이 있었고 황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궁정화가가 되는 것은 물 건너간 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40대의 나이였고 1578년에는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도 태어났습니다. 엘 그레코는 아들의 어머니인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 부인과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을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크레타 섬에서 이미 결혼을 하였고 그 관계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심이 갚은 그가 다시 혼인신고를 하는 반신앙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정착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그는 톨레도를 떠나지 않고 작업장을 마련하여 주변의 작은 교회와 개인들의 주문을 받아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두 봉헌자 The Crucifixion with Two Donors>

The Crucifixion with Two Donors 1580 Oil on Canvas 171 x 260 cm Louvre, Paris, France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두 봉헌자 The Crucifixion with Two Donors>는 이 그림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다른 그림에 비해 평온합니다. 그러면서도 틀어진 몸짓과 손에 난 핏자국은 십자가형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배경은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을 그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삽자가 아래 두 사람은 각각 16세기의 성직자와 귀족의 모습으로 모두 십자가형을 당한 그리스도를 보며 경배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직자는 두 손을 모은 경건한 모습이고, 귀족은 한손은 가슴에 얹고 다른 한손으로는 다른 사람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모두 함께 경배하자는 호소와 함께 그림 속 두 주인공들의 마음을 다잡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열풍이 불고 있었던 시기로,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종교개혁의 바람을 막으면서 한편으로 교회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엘 그레코는 당시 이런 분위기를 담은 내용을 엘 그레코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내용과 현실의 공간이 하나의 화폭에 담아 종교적 초월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도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에도 이어집니다.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 1586-88 Oil on canvas, 480 x 360 cm Santo Tome, Toledo

 

이 그림의 주제는1323년 사망한 톨레도의 오르가스(Orgaz)에 살았던 돈 곤잘레스(Don Conzales Ruiz de Toledo) 백작의 장례식 때의 벌어진 일입니다. 이 백작은 평소에도 교회에 수도회에 많은 기부를 하고 베풂의 정신이 투철해 존경을 받던 귀족인데 죽음을 앞두고도 유언을 통하여 그의 사후에도 매년 800냥의 성금, 두 수레 분의 땔감, 양 두 마리, 닭 열여섯 마리, 미사주 두병을 헌납할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 업적을 기려 그를 교회 입구에 매장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과 정성에 감동해서 그의 장례식에는 하늘에서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제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나타나 백작을 추모하고 운구에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그 백성들에게 봉사한 자의 상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자 백작의 후손들은 유언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매년 기부를 받아 왔던 교회는 후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재판을 걸어 승소하였습니다. 1586년 산 토메 성당의 사제 안드레스 누네스 데 마드리드(Andrés Núñez de Madrid)는 재판이 끝나고 후손들에게 백작의 유언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엘 그레코에게 “오르가스 백작 장례식의 기적”을 그려달라고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주문은 받은 화가는 약 9개월에 걸친 노력 끝에 이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윗부분은 사후 세계에 관심이 많은 스페인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하여 구름 사이로 천국으로 가는 좁은 통로가 있고, 심판주로서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와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세례자 요한과 성 베드로 등 여러 성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림의 장면으로만 보면 오르가스 백작의 생전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영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순서인 것 같습니다. 붉은 옷의 성모 마리아와 그 앞의 천사 사이에 포대기에 싸인 아기의 모습이 백작의 영혼입니다. 백작의 영혼에는 이미 성모 마리아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보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밑 부분은 성 스테파노 부제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오르가스의 부축을 받아 안장될 준비가 되고 있는 백작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집도하는 신부와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관객을 바라보며 손으로 이 장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선행을 하면 이렇게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당시 종교 개혁을 주도 하던 개신교의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기치에 대한 도전이라는 평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제 당시 생존해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림의 윗부분 세례자 요한 뒤편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펠리페 2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이 실망감을 나타내는 감상자들도 있습니다. 당시 스페인이 다른 민족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생각하면 이 그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인들이 있는 위치에 이 황제를 배치한 것은 화가의 평소 신념과는 다른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달라는 아부라는 평도 받습니다. 그림의 밑 부분에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는 이 그림을 주문한 산 토메 성당의 사제 안드레스 누네스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화가의 친구들이나 당시 생존해 있던 다른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만, 엘 그레코 자신과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도 등장합니다. 성 스테파노 바로 뒤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화가 자신입니다. 성 스테파노 곁에 횃불을 들고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라고 하는 소년이 바로의 화가의 아들입니다. 이 소년의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에는 그리스어로 된 서명과 아들이 태어난 해인 ‘1578’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엘 그레코가 그의 아들을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엘 그레코는 종교화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반(反)종교개혁적인 신앙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신비주의적인 시각예술로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대관식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1591, Oil on canvas, 90 x 100 cm, Museo del Prado, Madrid

 

 

엘 그레코가 작품 중에 종교화 다음으로 많은 그림이 초상화입니다. 베네치아 시절부터 그는 초상화가로 인기가 있었고,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성공한 후에는 초상화 주문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는 단순한 묘사를 통하여 기억에 남는 성격묘사를 창조하여 티치아노 및 렘브란트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El Caballero de la Mamo en el Pecho(The Knight with His Hand on His Breast) Oil on canvas, 81 x 66 cm Museo del Prado, Madrid

 

<호르텐시오 펠릭스 파라비시노 수사>

Portrait of Hortensio Felix Paravicino c. 1609,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oston

 

"크레타는 그에게 생(生)을 부여했지만 톨레도는 그에게 영생(永生)을 부여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파라비시노와 엘 그레코의 우정도 유명합니다. 이 둘은 나이차이가 30년 이상이었지만 친구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파라비시노는 당시 신동으로 유면했는데 다섯 살에 이미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스물한 살에 살라만카(Salamanca) 대학의 철학, 수사학 (Rhetoric) 전임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수도회(Trinitarian)의 수도자였으며 지식인이자 설교자였으며, 유명한 시인으로 엘 그레코를 기리는 소네트를 쓰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자기 분야의 대가이기도 했고 두 사람이 모두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오른손엔 지식의 상징으로 두툼한 책이 쥐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추기경>

Portrait of a Cardinal c. 1600 Oil on canvas, 180.8 x 108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엘 그레코의 초상화 중에 제일 특이한 작품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의 지위도 그렇지만 화려한 색상과 전신상이라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1599년부터 1602년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최고 심문관으로 활동했던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Fernando Niño de Guevara)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의 경력이 그래서인지 그의 눈에 개인적 야망이 보이는 것처럼 보이고 그림에 나오는 바닥 무늬 등 장치들이 불안해 보입니다. 땅에 떨어져 있는 종이가 사람을 화형에 처할 수 있는 종교재판의 판결문 같습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는 몇 점의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톨레도 풍경>

A View of Toledo 1597-99 Oil on canvas, 121,3 x 108,6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View and Plan of Toledo, c. 1610, Oil on canvas, 132 x 228 cm, Museo de El Greco, Toledo

 

이런 그림은 당대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장면들은 톨레도의 대성당과 왕궁이었던 알카사르(Alcázar), 타호(Tajo)강 등이지만 이것들을 재배치하여 주관적이고 표현주의적인 풍경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습니다. 건물들은 모두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어 환상적인 느낌입니다. 엘 그레코는 명문에서 ‘산후안바우티스타 병원을 앞쪽의 구름 위에 그린 것은 더욱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림 속의 지도는 톨레도 시내를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오콘>

Laokoon(Laocoon) 1610 Oil on canvas, 142 x 193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라오콘 Laocoon>은 엘 그레코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삼은 유일한 작품입니다. 그림은 매우 역동적인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이 놓고 간 목마를 성내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트로이인들에게 경고했다가 그리스의 편을 들던 미네르바(Minerva, 그 : 아테나)가 보낸 뱀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엘 그레코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종교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톨레도의 대주교이자 카를5세의 고해신부였던 바르톨로메 카란자(Bartolomé Carranza)는 시민들에게 이단의 위험에 대해 경고를 했지만 1559년 체포되어 당시 권력 투쟁의 양상을 띤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17년을 복역했습니다.

 

엘 그레코는 비록 궁정화가는 되지 못했지만 톨레도에 거주하면서 교회나 수도원의 성화나 초상화를 그리며 열심히 살다가 1614년 4월 7일, 톨레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늘 주변의 지식인, 학자, 성직자들과 어울렸으며 본인도 굉장한 지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재산목록에는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된 미술, 신학,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논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이런 학습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별 대접을 받지 모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에 그는 궁정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잊혔고 화려한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거기다 그의 아들이 수녀들과 다툰 후에 새로운 교회 묘지를 옮겼는데 100여 년 전에 그 교회가 파괴되면서 이 예술가의 무덤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일그러뜨려 표현한 그의 그림을 보고 혹자는 그가 난시(亂視)였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도 합니다. 또한 그림에 자신만의 장치를 만드는 그를 보고 속물주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관심을 끌지 못하던 엘 그레코와 그의 작품들은 19세기가 되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았습니다.

 

A Boy Blowing on an Ember to Light a Candle (Soplón) 1570-72 Oil on canvas, 60,5 x 50,5 cm 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 Naples

 

<요한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The Opening of the Fifth Seal of the Apocalypse c. 1608-14 Oil on canvas, 224.5 x 192.8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이런 그림들이 16세기에 나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개신교의 종교 개혁과는 다른 쪽에서 신앙을 가며 자신만의 신비주의적인 표현 요소를 동원해 수많은 종교화를 그렸던 그의 활동은 고독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세잔 등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장을 만든 화가로 재평가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시대를 먼저 살다간 천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oil on canvas 244 x 233.7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피카소는  "입체파(큐비즘)는 스페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입체파를 만들었다. 우리는 세잔에게서 그가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알아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엘 그레코이다." 며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에 <요한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마르크는 독일 표현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엘 그레코가 모든 것의 '혁명'이라고 말했고, 릴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시를 썼으며, 잭슨 폴록은 엘 그레코의 그림 사본 60여점과 그에 대한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엘 그레코의 일대기는 2007년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국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에 대해 알고 싶으면 화가의 이름과 같은 <엘그레코(El Greco)>란 책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