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력자원부

무거운 빈가방 2010. 4. 5. 22:29

10-04-02 인력자원부(하이펙텍나다)

 

 

감독 로랑 캉테 출연 자릴 라스페르 (프랭크 역), 장 클라우드 발로드 (아버지 역), 찬탈 바레 (어머니 역), 베로니크 드 판델라에르 (실비 역), 마이클 베그네즈 (올리비에 역)

 

줄거리.

파리의 그랑제꼴에 다니는 우수한 재원 프랑크는 졸업을 앞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공장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프랑크의 아버지는 공장의 관리자 자격으로 인턴십을 받게 된 아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근로자들의 복지와 인사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프랑크는 공장 근로자의 복지를 위해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적극 추천한다. 그러나 자신이 제안한 방식이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근로자들을 해고 당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자,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는 대대적인 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씨네21에 실린 ibuti님의 글이다.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던 프랑이 지방 도시의 공장 인사부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게 되자, 그곳 현장 근로자로 일하는 아버지는 장차 관리자가 될 아들을 보고 뿌듯해한다. ‘주35시간 근무제’의 도입에 관한 일을 맡은 프랑은 협상과 설문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안건인 종업원 해고안을 우연히 보고 분연히 일어선다. <인력자원부>는 근래 보기 드물게 노동현장에서 우직한 목소리를 내는 영화다. 현실 때문에 눈을 감고 사는 아버지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정의를 선택한 아들의 갈등이 영화의 축을 이루는 가운데, 노동자 내부와 경영진과 노조 사이에 가로놓인 갈등이 사실적으로 다뤄진다.

로랑 캉테는 ‘일하는 인간’보다 ‘노는 인간’을 추구하게 되면서 더이상 노동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21세기를 염려하는 작가다. 캉테는 노동하지 않는 것을 유토피아로 인식하는 현실과 대안없는 노동자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본다. 그리고 육체의 힘과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인력자원부>에 이어 만든 <타임 아웃>은 실업에 처한 남자의 삶을 통해 노동하지 못하는 자가 자각하는 존재의식을 명상의 경지까지 이끈 작품이었다. 근작 <남쪽을 향하여>을 아직 보진 못했지만, 나는 그가 노동자의 동지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소규모 영화제에서 몇번 보여진 <인력자원부>가 DVD로 출시됐다. PAL 마스터를 사용한 영상은 평균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부록으론 예고편과 포토갤러리가 전부지만, 본편 영화의 힘만으로도 꽉 찬 느낌을 주는 DVD다.

 

****************************************************************

 

인력자원부라 하기에 무슨 정부 기관인줄 알았다.

프랑스에서는 취직 전에 견습 기간이 있는 모양이고 흔히 말하는 사무직이 인력자원부인지 아직 잘모르겟다.

 

‘클래스’와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이 없다.

캉테 감독은 음악으로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피하고 화면과 배우들의 움직임, 위치 그리고 대사를 통해서 감정을 움직인다 아니 감정은 독자의 몫이고 자신은 있을 수 있는 것들을 그저 사실적으로 펼쳐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음악이나 나레이션이 영화를 보는데 방해를 받는 경우도 많아 한 때 ‘음악 없시몬 영화가 안되나?’ 하는 생각을 해 본적도 있었다.

캉테 감독은 내 생각을 잘알았던 것 같다. 그런 때문인지 영화 자체에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영화에 몰입할 수가 있었으니 음악없는 영화의 힘도 함 느껴볼 만 하다..

 

노동직과 사무직에 대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만이 아니더라도 보는 관점이 비슷하다. 노동직은 몸으로 일을 하고 임금을 받으니 힘듬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사무직은 비록 머리를 싸메 골이 깨어지더라도 몸을 덜 움직이니 편히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것은 노동으로 인한 세상의 유지 차원에서의 선언이란 생각이 든다. 많은 영화나 삶에서도 그리 느껴진다. 신성한 노동을 통해 세상의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을까? 

내게 둘 중 무엇을 택할래? 라는 선택권을 준다면 월급이나 조건 등이 같다고 하더라도 사무직을 택하고 싶다.

 

사장을 중심으로 한 관리직이 회사의 이익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 중 임금의 절감과 기계화.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이 아니면 살아나갈 방법이 별로 없는 노동자들의 모습

‘노동 시간의 절감으로 여가를 찾는다’는 달콤함 보다는 조금 더 일하더라도 임금을 더 받아 생활에 안정을 취하고픈 국민 노동자(워낙 국민XX란 말을 잘 쓰기에 )의 모습

단결하지 않으면 진다는 ‘노동운동의 명제’와 지금 일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먹기 어렵다는 현실.

자본가와의 날을 세우는 노조대표, 대표를 싫어하는 노동자와 다르는 노동자, 계급간의 삶의 모습. 자부심과 실망감 그리고 창피함.

 

인력자원부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른 것이 전혀 없는 듯이 보여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파업에 경찰이 없고 용역도 없다. 자기 주장들을 뚜렷이 하나 힘으로 하는 강제가 없다. 선택은 각자에게 있으며 책임도 각자에게 있다.

(파주와 똥파리를 이 영화와 함께 감상하여 비교해 봄도 좋을 듯하다. 영화관에서는 감독전도 좋지만 주제전을 펼쳐주면 좋겠지?)

 

이 영화는 노동을 매개로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라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부모와 자식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노동의 이야기라는 것이 더 나을련지?

회사에서의 사무직(견습이지만-아들)과 노동자(아버지)라는 두세력을 사건의 중점에 두었지만. 물론 이에 대해 자식이 다 따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부모도 자기 결정이 있고 자식도 자기 결정이 있다. 충돌과 화해는 언제든지 어디서든 있을 수 있다.

 

 

클래스와 마찬가지로 인력자원부도 결론이 없다. 인생살이에 어떤 사건이 있다하여 뚜렷한 결론이 없듯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지금 일의 성공여부에 대해서도.

그래서 캉테의 영화는 영화를 본다는 생각 보다는 인생을 본다. 내 삶이나 주변의 삶을 그냥 관조적으로 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