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원의 빛

무거운 빈가방 2010. 4. 13. 00:58

부산에 가는 주말에는 정리가 항상 밀린다. 부산에서는 머무는 시간이 얼마 없기에 늘 허겁지겁이다. 식사는 두끼 정도는 울모친과 해야기에 더 그렇다. 같이 살다 홀로 두니 마음이 무겁고 무거우니 조금 가볍게 하려면 같이 밥묵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지난 목요일 본 것 이제 올린다. 영화음악 정리도 꽉 밀려 있는데   걱정이다.

 

10-04-08 초원의 빛(씨네마테크)

 

감독 엘리아 카잔

출연 나탈리 우드 (윌마 역), 워렌 비티 (버드 역), 프레드 스튜워트, 조라 램퍼트, 바바라 로덴

 

1920년대 캔사스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 잘 생긴 부잣집 소년 버드(웨렌 비티)는 여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가 좋아하는 소녀는 윌마(나탈리 우드)이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름답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혈기 왕성한 버드는 윌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만 윌마는 이를 거절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성에 대해 무지했던 그녀는 버드와의 육체적 관계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버드는 다른 여학생과 어울리고, 연약한 윌마는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상처를 감싸려고 그들의 교제를 금지하자 그녀는 더욱 악화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게다가 버드의 집도 파산하게 되어 버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세월이 흘러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 버드는 윌마의 친구였던 안젤리나와 결혼하여 평범한 기술자가 되었고, 윌마 역시 병원에서 나와 평범한 숙녀가 되었다.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이영화의 키워드 : 청춘, 사랑

제작노트10대 청춘 영화의 고전. 아역배우로 인기를 얻고 있던 나탈리 우드와 첫 주연작인 이 영화 한편으로 소녀들의 우상이 된 웨렌 비티는 이 영화 이후 실제로도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미국에서 맥카시 광풍이 불 때 밀고자로 낙인찍혔던 엘리아 카잔이 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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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원의 빛이여! 언제인가? 나탈리우드의 눈빛 만으로 얘간장을 태웠던 그 빛이여. 세상의 소녀들은 웨렌비티 때문에 그러했다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나탈리우드의 표정, 아래층으로 뛰어내리려는 버드의 아버지 모습과 농장에서 다시 만나 돌아가는 나탈리를 쳐다보는 비티와 그의 아내의 표정이다. 이들은 모두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에게도 뭔가 꽂혔든 모양이다.

 

씨네마테크의 엘리아카잔 특별전 덕분으로 영화관에서 다시 접하게 되다니 기쁜 영광이다.

옛날에 영화 볼 땐 좀 헷갈렸다. 이들이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지금도 그렇다. 내용은 고등학생이나 성숙된 모습의 출연자들 때문에 고교생으로는 너무 늙어 보인다. 지금 영화였으면 훨씬 더 어리게 나왔을 법하다.

미국의 고교생들은 우리처럼 군대라는 긴세월을 복무할 필요가 없기에 졸업 직후 결혼도 가능하다. 게다가 학창시절 어느 정도의 연애는 늘상 있어오는 미국이니.

‘언에듀케이션’에서 보듯이 20세기 후반이 되기 전 까지는 서양 사회에서도 ‘순결’이나 ‘혼전성관계’에 대해서는 제법 엄격한 모양이다. 자식의 무러익은 사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버드를 요구하는 아버지와 딸의 순결만을 위해 딸의 모든 것을 규제하려하는 엄마의 굴곡된 애정이 사랑하는 남녀를 너무 오랫동안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병은 치유되어도 상처는 남기마련. 극복하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받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 무엇으로 보상 받을 수 있을까? 누가 치유해 줄까? 세상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 몇이나 있겠노 만은 그래도 사랑하면서 떨어져야 하는 연인, 가족, 친구...... 이들의 아픔에 비교할 대상이 있을까?

부모가 규제하려는 것은 남녀 문제만도 아니겠지? 성격, 태도, 공부, 친구관계, 미래의 꿈, 생활방식 등등 매우 광범위 하다. 세상의 부모가 반성해야 할 일들일까?

 

정신과 육체의 끓어오르는 고통 때문에,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나탈리우드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너무 요상야릇하다, 괴로움이 얼굴에서가 아니라 폐부 깊숙한 곳에서 각혈하듯 우러나오는 모습이다. 살아가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는 그런 표정이다. 이 글을 두드리는 지금도 속이 이상하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장면의 설정이나 내용 조연들의 긴장감 넘치는 규제 보다는 얼굴에 나타나는 모습들이 가장 큰 압권이다.

 

아래 사진들에선 그 표정이 나오질 않는다. 아쉽다.

 

 

 

 

 

초원의 빛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