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치카마츠 이야기 - 미조구치 겐지의 빼어난 사랑 이야기

무거운 빈가방 2013. 3. 29. 00:30

치카마츠 이야기 (1954) 近松物語 The Crucified Lovers

 

 

요약정보 드라마 | 일본 | 102 분 | 개봉 2009-11-19

 

 

감독 미조구치 겐지

출연 하세가와 카즈오 (모헤이 역), 카가와 쿄코 (오상 역),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에이타로

 

 

전편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XrQiZyR3kWM

 

주제가다. 곡만 들으면 우리의 옛가요가 어이 형성되었는가 충분히 알 수 있다. 뽕작도. 

http://www.youtube.com/watch?v=cG9CoJQUCo8

 

쫓기는 그들은 자연스레 사랑이 형성된다. 처음엔 부인이 너무도 철부지라서 답답한 마음이 생기나 이는 둘을 맺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http://www.youtube.com/watch?v=7agDJoqOZ0s&list=PLIUpV8nQRA5if_uZpwyOsjQny2LBvXCai

 

맨 마지막 이야기의 끝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끝장면은 첫장면의 다른 남녀가 묶여 가는 것과 같지만 시작엔 둘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끝은 둘의 얼굴을 비추줌으로써 사랑과 불륜의 이면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준다.

http://www.youtube.com/watch?v=RAQviwjKyow&list=PLDCB0588B1640A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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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이리 지낫음에도 유려한 카메라의 장면들은 영화 속으로  쏙 빨려들 듯 하다.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사랑이 가열되는 시간들에 대해 끈기를 가지고 다가감은 내용상의 강점이고

복도를 통한 동선과 신분 상하간의 위치와 교차점 등은 눈을 시원하게 하면서 인물간의 대치점과 긴장감도 만들어 낸다.

 

요쓰야 괴담에서 본 '하세가와 카즈오'의 다소 눈에 밟히는 연기는 영화의 전반적 대부분의 것이 다 매워버려 여기서는 큰 흠이 되질 않는다.

 

아래에는 위키리 백과에서 발췌한 겐지의 일생과 강연장에서 들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올려둔다.

겐지 특별상영으로 일본문화원에서 4주간 영화와 강연이 있었는데 바쁜 일상으로 한번밖에 참석을 못햇다. 매우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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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모헤이는 부유한 표구상 집안에서 달력 제작 전문으로 일한다. 주인집 마님 오상이 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그녀에게 돈을 마련해주려다가 오히려 오해를 당해 오상과 불륜의 관계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주인의 분노를 알게된 두 사람은 가출해서 비와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같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에게는 진정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도피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미조구치의 영화 중에서도 특히 연애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형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맹세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는 눈물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없다는 시대의 제약을 넘어서는 연애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제작노트★ 1954년 키네마준보 베스트 텐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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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51년도에 '라쇼몽'으로 베니스영화제에 대상을 받앗을 때 미조구치 겐지는 매우 기분이 나빳다 한다.

이 후 겐지는 국제적 상을 의식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여 세계적 유명세도 억었고 일본의 3대 거장 중 한명의 든든한 반열로 자리 잡는다.

 

일본 영화는 1930년대에에 1년당 600편이 넘을 정도로 헐리우드를 뛰어넘을 전승기를 구가하였고

1950년대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그 시기 미국,프랑스와 함께 자국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선진국으로 자리잡는다.

 

치카마츠 이야기는 1680년대에 실제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찍엇다는데 주연 배우가 일찌기 영화사에 의해 낙점 되었는데 당시 가부끼 출신으로 국민적유명세를 타던 배우였기에 감독이 마음대로 못하던 대상이엇다 한다. 감독은 배우들으 ㄹ휘저어면서 총알같이 영화를 찍는 스타일이기도 한데 뜻대로 못하니 배우들을 죽도록 고생시켰다한다. 심한 것은 50테이크도 가기도 했으니 이유도 모르고 다시 연기해야 하는, 도는 찍는 사람들의 심정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세계적 유명에 대한 열망(우리나라는 열병 수준이다.)이 매우 강했는데 영화 기법상 서양의 입식 가옥구조에서의 카메라와 일본의 좌식 구조가 다른 점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한다.

 이 안장 사는 가옥구조를 어이 표현해야할까? 하는 고민에서 일본의 영화 스타일이 완성되고 미조구치는 실내-실외의 경계지점인 복도를 많이 활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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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겐지 감독(1898~1956)은 니카츠에서 여자 역할 전문 배우로 영화 일을 시작했으며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22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감독하게 된다. 무성영화 시절에 90여 편에 이르는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베니스영화제를 대상으로 마지막에 만든 12편의 영화만이 소개되었다.

하류층 가정에서 가난하게 자라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학대 받던 어머니, 여동생들과 돈 때문에 팔려간 누나를 보면서 자라왔다. 이런 경험은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결과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봉건적 일본이 가진 사회적, 성적 관행들을 반영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절묘한 사용,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과 롱 테이크로 유명하다. 그의 초기작에 속하는 <오사카 엘레지>(1936)와 <기온의 자매들>(1936)에서는 전쟁 전의 남성 우월주의적 사회에서 고통 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결국 일본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수 세기 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음을 그의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1956년 8월 24일 일본 쿄토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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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미조구치 겐지(溝口 健二, みぞぐち けんじ, 1898년 5월 16일 ~ 1956년 8월 24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겐지는 도쿄 시 아사쿠사 구 (현·도쿄 도 다이토 구 아사쿠사) 출신으로,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의 가정환경은 비참한 수준이어서 그의 누이를 게이샤로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이 일은 겐지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 사이에서 그는 강하게 저항하곤 했으며, 그는 평생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베(神戸)의 광고 디자인 일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우신일보(又新日報)사의 삽화가로 일하기도 했다. 1920년에 그는 닛카츠(日活) 촬영소에 입사하는 것으로 영화계에 투신했는데 처음에는 배우로 시작했다. 3년뒤 니카츠에서 감독이 되었고 관동대지진이후 동경촬영소로 옮긴다. 1925년 내연의 여인에게 면도칼로 찔리는 사건이 있은 후 여성을 테마로 한 작품을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1939년 나카다 마사이치(永田雅一)의 다이이치 영화사(第一映画社)에 참가하고 이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 창립 이후 전속이 된다.

 

 

겐지의 초기 작품들은 탐색에 가까운 것으로 유진 오닐이나 톨스토이등의 작품들로 문예영화를 만들거나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을 따라해보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작업속도는 매우 빨라서 몇주만에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흥행성적도 좋았다. 그래서 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 70여편의 영화를 찍는 것이 가능했는데 현재 이것들은 거의 유실되었다. 뒤쪽의 것들은 소위 경향영화(tendency film)라고 불리는 것들로 겐지는 그 작품들에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었고 선구적인 존재가 되었다. 1936년의 기온의 자매들과 나니와 엘레지 이후가 되어서야 겐지는 자신의 인생을 대표할 만한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중기에 겐지는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를 담는 사회파 영화인 '뉴 리얼리즘' 감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문부성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앞선 두 영화처럼 남성중심사회에 반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시기에 겐지는 그의 유명한 방법론인 '원신, 원샷'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의 섬세하고 정통적인 세트 디자이너인 미즈타니 히로시는 겐지가 광각렌즈를 자주 이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쟁기간동안 겐지는 선전영화를 찍도록 군부로부터 강요받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장 이야기를 담은 사무라이 시대극 원록충신장(1941)이다. 이 시기에 겐지는 문제가 될 만한 소재를 피해서 작품생활을 했다. 일본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던 무렵의 혁명적인 영화 여인의 승리(1946)나 내 사랑은 불탔었지(1949) 이후 겐지는 시대극으로 전환하여 전래되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주로 비극적 취향이 강했다. 이 때는 시나리오 작가인 요다 요시타카와 주로 함께했다. 이 때가 가장 인정받는 시기로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우게츠 이야기(1953)을 비롯해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오하루의 일생(1951)이 그러하다. 산쇼 태부(1954)는 봉건사대 일본의 유교적 도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편에 가까운 그의 영화 중에 칼라영화는 신페이가 이야기(1955)와 양귀비(1955)뿐이다.

 

 

겐지는 교토에서 58세로 죽었는데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작품세계

 

겐지의 영화는 주로 여인의 승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초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감독으로 꼽힌다. 그는 더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속에서 학대받고 짓밟힌 여인들의 처지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게이샤의 곤경을 자주 다루곤 했지만 그의 주인공들은 창녀, 노동자, 거리의 운동가, 주부 심지어 봉건시대 귀한집 아가씨까지 다양했다.

 

 

그의 영화는 일본 회화를 연상시킬정도로 탐미적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풍성하고 묘사적인 미장센을 추구했다. 클로즈업과 같은 서구풍의 기법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보통 몇분이나 되는 신을 만들곤 했고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풍의 조명과 세팅을 통해 장소에 포인트를 두었다. 겐지는 관객과 캐릭터간의 절묘한 공감을 만들어 특유의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그의 가장 좋은 작품들은 대개 상당히 감동적이다.

 

 

겐지의 리허설에 대한 강박은 악명높았는데 특히 여배우들이 고생했다. 롱테이크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금의 실수도 재촬영으로 이어졌고 그는 한 샷을 찍기위해 거의 백여번씩 리허설을 하곤 했다. 다나카 쿠니요는 겐지 영화의 단골 여주인공이었는데 한번은 겐지가 그녀에게 역할을 위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강요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겐지는 자끄 리베뜨와 같은 평론가에 의해 서구에서 먼저 재평가를 받았고 특히 장뤼크 고다르를 비롯한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원신 원샷' 기법은 앙드레 바쟁과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리얼리즘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연보1923년「愛に甦へる日」

1933년「滝の白糸」(原作:泉鏡花)

1935년「折鶴お千」(原作:泉鏡花)

1935년「虞美人草」(原作:夏目漱石)

1936년「浪華悲歌」

1936년「祇園の姉妹」

1938년「露営の歌」

1939년「残菊物語」(原作:村松梢風)

1941년「芸道一代男」

1941-42년「元禄忠臣蔵(前後篇)」(原作:真山青果)

1946년「女性の勝利」

1946년「歌麿をめぐる五人の女」(原作:邦枝完二)

1947년「女優須磨子の恋」(原作:長坂秀雄)

1948년「夜の女たち」(原作:久板栄二郎)

1950년「雪夫人絵図」(原作:舟橋聖一)

1951년「お遊さま」(原作:谷崎潤一郎)

1951년「武蔵野夫人」(原作:大岡昇平)

1952년「西鶴一代女」(原作:井原西鶴):베니스 국제영화제 국제상

1953년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원작:上田秋成):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

1953년「祇園囃子」(原作:川口松太郎)

1954년「噂の女」

1954년「近松物語」(原作:近松門左衛門)

1954년「山椒太夫」(原作:森鴎外):베니스 국제영화제 동사자상

1955년「新平家物語」(原作:吉川英治)

1955년「楊貴妃」

1956년「赤線地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