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 잊었던 것을 떠올리려 애쓰는

무거운 빈가방 2010. 5. 23. 05:07

10-05-19  시 - 잊었던 것을 떠올리려 애쓰는 영화 (아트모모)

 

 

 시 같은 영화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고 머리에 떠오를 듯하지만 떠오르지 않는.

시는 내 영역이 전혀 아니기에 어떻게 해석하기가 어렵다. 극중에서도 현대인에게 시란 멀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감독도 이런 의도를 다분히 가지고 ‘시’를 찍었으리라.

 

 ‘시’는 대체로 적는 사람이 뭔가 시상을 떠오르게 하려고 용을 쓴다. 주인공 미자씨처럼. 게다가 오랫동안 출연 하지 않았던, 이제는 원로 배우가 되어버린 전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도 이러한 의미가 있으리. 점점 잊혀져 가는 뭔가(여기서는 도덕적인 것인가? 인간적인 것인가?)를 잡으려 하는 시상과 잊혀져간 원로배우의 출연.

 

 

 그래서 처음부터 어렵게 다가섰고 봐야할 영화 3개(하녀, 하하하, 시) 중 제일 늦게 보게 되었다. 시를 낭독할 때 그냥 읽는 경우 보다는 호흡을 가다듬고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고 읽듯이 영화 보기전 ‘숭고한 의식’을 거친 뒤 보라고 감독이 강요한 것처럼.

 

 김용탁 시인의 시 강의. 낭독, 시상 이런 것들은 여전히 어려우나 영화는 일상과 시가 겹쳐져 나오기에 일상을 보듯한 시선으로 따라가면 오히려 시가 쉽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해 준다. 시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나 영화는 그래서 재미있다. 할매의 심정이 화면을 통해 가슴으로 전달된다.

 

 

 미자씨는 육십 넘어도 지체부자유 영감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가는 팍팍한 살림의 할머니지만 옷 입는 것은 깔끔하면서도 멋지다. 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젊었을 땐 잘나간 여성인 모양이다. 어떤 경우든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도 쓴다. 스스로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그런 할매가 시를 배우겠다고 문학강좌에 문을 두드린다. 나 보다 훨씬 더 용기있는 노인이다. 언제나 당당한 것도 할매의 매력이다.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치매의 문제는 다가올 미래이지만 가슴에 피어오르는 시에 대한 감정은 억누를 길 없다.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겠지. 외손자가 저진 일은 금전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려움을 맡게 하고 시상과 처리해야 할 일이 겹쳐서 못내 혼돈스럽다.

 

 

 영화속에 음악을 대체로 배제하고 사실적 소리에 초점을 맞추는 이창동 감독은 역시 시작과 끝을 강의 물소리에서 열고 맺었다. 시처럼 흐르는 강을. 그 강은 소리내어 흐르고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죽음의 유혹도 되겠지.

 

 시작에서 영화 제목 ‘시’는 죽은 소녀가 물 위로 떠내려가는 곁에 나온다. ‘이런 것 잊어버리고 있제? ’ ‘기억해야 한데이, 잊지 마레이’ 하듯이.

 미자씨가 외손자 대신 죽은 소녀의 손을 잡는 것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대한 꾸짖음 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 부르짖지는 않지만 ‘시’를 통해 조용히 내어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존경스럽고 고맙기도 하다.

 

 글은 요까지 했으면 한다. 상영관에서 영화를 내리고 나면 좀 더 적을 요량이다. 답답한 마음 억누를 길 없지만 대단한 감독의 영화를 이리 마음먹으면 볼 수 있다는 게 고맙다. 씨네 21의 글 길게 두려다 만다. 다음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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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하나 짓네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 비평사, 1997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시던

엄마 기억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 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내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퍼내고 퍼내어도

자꾸만 차 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그 것, 그 쬐끄만한

물푸레 나뭇잎 만지는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조영혜

 

 

 

십일월

 

당신의 등에선

늘 쓰르라미 소리가 나네

 

당신과 입술을 나누는 가을 내내

쓰르라미 날개를 부비며 살고 있네

귀뚤귀뚤 나도 울고 싶어지게

쓰르람쓰르람

눈부비며 살고 있네

이제껏 붉던 입술은

낡은 콘크리트 벽안의

박제 된 낙엽처럼

바시시바시시 떨고 있네

지난 여름 손톱에 핀 봉선화 져 가도록

당신의 등에서 자꾸 쓰르라미가 울고

귀뚤귀뚤 나도 따라 먹먹해져서

당신과 포개어 가만히 누워 보고 싶네

 

-조영혜

 

 

 

장미 가시의 이유

 

날 훔치려 말아요

내 안의 가시

온 몸 소름으로 돋는 날

더딘 맥으로 밀어내는 저 대궁의 우울

자결을 꿈꾸는 검붉은 미소 보아요

내민 손 거두어 주세요

수레바퀴는 구르기만 하던 걸요

 

어여쁘단 말로

꺾으려 하지 말아요

아프단 말 대신 자꾸 키워지는 가시

붉은 입술을 지켜야 하는 필사의 무기

소리 없는 눈물

그건, 무던히도 견디어 준 인내의 꽃

모르나요

겹겹의 붉은 물결이 잠시 흔들리는 것은

단지 내 안의 오월 탓이란 걸

이젠 정말

비가와도 가지려 하지 말아요

수레바퀴는 그냥 구르기만 해요

 

-조영혜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의 영화 '詩' 中에서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