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추리에 살다 / 대추리 전쟁 - 서울인권영화제

무거운 빈가방 2010. 5. 30. 23:03

10-05-27 대추리에 살다 / 대추리 전쟁 - 서울인권영화제(마로니에공원)

 

먼저 올린 글을 수정한다. 수정 이유는 내 감상문 보다 해설집의 글이 훨씬 더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해설집의 내용은 '인권영화제' 홈에는 없기에 해설집을 먼저 올리고 내 글은 뒤로 미룬다. 혹 우연히 여길 들어 온 사람이라면 해설집 글은 반드시 읽어 보시길 당부드린다. 영화의 내용을 잘 정리하였다.

 

*********************************************

대추리에 살다

 

요약집 정리

들녁에는 버들이 춤추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닌다. 송충이 한마리가 잎사귀 위로 기어가는가 하면 그 옆에선 마을 아낙들이 김치를 담그며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전형적인 농촌마을 대추리. 하지만 그 한편에선 거대한 포클레인이 들녁을 짓밟고 군인들과 전경들의 군화와 방패 소리가 지천을 울린다.(여기선 사실 국방부 사람만 나오지 군인은 나오지 않는다. 용역은 잠시 나온다.-블로그 주) 이곳 또한 대추리다. 2004년 미국과 한국간에 합의된 주한미군 재배치와 평택미군기지 확장은 이곳에서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기를 원했던 주민들의 평화로운 삶을 뿌리 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영화는 이러 ㄴ소박한 꿈조차 사치가 된 대추리 주민들과 이들을 지키고자 이주한 지킴이들의 힘겨운 싸움을 소소히 따라간다.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지킴이들은 그들의 몸을 밀쳐내는 방패에 저항하며 거친 소리를 쏟아내지만,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는 책임없는 방패 앞에서 서글픈 울음으로 변한다. 대추리. 2년 동안 타고 있는 촛불을 이제 그들은 내려놓을 수 있을까. 

 -- 종민(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요약정보(홈페이지) 다큐멘터리 | 한국 | 82 분 감독 정일건 (길(2008), 할매꽃(2007))

겉보기엔 생명소리가 들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대추리. 하지만 2004년 이곳은 땅을 지키려는 농민들과 농민이 땅의 빼앗으려는 정부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 후, 미군기지의 부지가 되어버린 이곳에서는 끝까지 남아 땅을 지키고 농사지으며 살아가려는 주민들과 이들을 지키고자 이주한 평화지킴이들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된다.

 

대추리 전쟁 - 14회 서울인권영화제(2010) 초청국내작품(정일건)

 

경기도 평택 팽성읍에는 집과 논밭을 빼앗기지 않으려 싸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본군과 미군에게 두 번이나 땅을 뺏기고 쫓겨난 경험이 있는 평택 주민들. '더 이상은 쫓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이들의 저항을 담은 다큐맨터리다. 영화는 주민들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들의 솔직한 말은 '미국의 전략적 재배치와 같은 다소 멀고 추상적인 말에 비해 훨씬 생생하고 호소력있게 다가온다. 600여 일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주민들의 비닐하우스 촛불집회에서, 주민들은 나서서 발언하고 노래 부르며, 거대한 국가권력에 대항하며 생기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일치단결된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이간질하는 국방부, 떠나려는 사람과 남아있으려는 사람 사이의 의심과 갈등, '대통령 빽이 잇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내 던지고 가는 국외자, 이런 모습들도 카메라는 묵묵히 담아낸다. 그리고 2006년 대추리를 가득 매운 경찰병력과 시위대 간의 충돌과, 그 해 3월 부터 시작된 국방부의 '영농차단 작전'으로 국가권력과 본격적이고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동원된 용역깡패는 항의하는 주민을 폭행하지만, 주민들은 그저 맨몸으로 굴삭기를 막아설 뿐이다.

 -- 유성(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2010년 14회 서울인권영화제)

 

****************************************************

 

대추리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은 그냥 ‘농촌인데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땅의 수용이 이뤄져 이 지역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하는구나’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철거에는 언제나 강제수용이란 법 때문에 강제철거(용산, 영화 똥파리)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일방적 충돌로 인한 부상으 ㄴ그렇다하더라도 사망마저 동반한다 해도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때론 이 말이 지구 밖 우주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G20을 한다고 국격이란 것을 따지는 나라의 이야기는 절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추리는 단순한 그냥 농촌이 아니다. 식민지 때,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미군에 의해 그들의 군사기지 문제로 두 번씩이나 고향에서 강제에 의해 떠나 이제 겨우 자리 잡아 후손에게 땅을 물려준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또 다시 이주하라는 정부의 명령은 강제이주의 대물림이 되어 버린 ‘유랑의 숙명’을 강요하는 것이였다. 꼬마 때 이미 강제 이주의 아픔을 경험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좀은 젊은 이들 보다 더 단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라크나 터어키에 의해 견원시 되어지던 투르크족도 아니다. 엄연한 국적을 가지고 땅을 일구어 자식을 키우고 당당히 세금을 내던 사람이다.

 

노순택 사진전에서도 보았던 그런 장면들. 미군을 위해 한국경찰과 한국농민의 대치 상황. 그리고 폭력.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구를 위해 사는가?는 간단한 명제가 헷갈리는 현장 중 하나이다. ‘강제수용’이란 이상한 하위법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짓눌려 하층민의 삶을 처절히 짓밟기도 하고 뭉개버리기도 한다.

아픔이다. 뭐라 표현해도 간단명료히 아픔이다.

그런데 이것을 ‘숙명적 아픔’으로 받아드리려니 너무 굴욕적이고 인간의 삶이라하기에도 미치질 못한다.

 

채소류를 심으면서 내년에도 심을 수 있을련가? 하는 불안과 초조

이것에 대하여 철거 준비를 착착 진행하는 정부의 부지런함.

‘분노의 포도’에서 어느날 친구가 와서 집을 철거해 버리는 허망함은 영화라서 차라리 낫다. 그냥 남의 일처럼 보면되니. 지난 일이겠지 하면 되니.

대추리도 지난 일로 보면 참 좋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현실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면서 비슷한 사건이 늘어간다. (용산을 떠올려 보라)

 

이 영화에서 그래도 좀은 편한 것은 주민들끼리의 싸움이 적었다는 점일 게다. 국방위에서 철거한 일부 사람들의 집을 측량한다고 나타나 마을로 조금씩 밀고 들어올 때 이들과도 싸웠지만 먼저 이주를 한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배반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래서 다툼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 영화에 덜찍혔을 수도 있고 덜싸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일의 진행엔 언제나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은 전략상 기본 아닌가?

 정부관계자(여기서는 국방부와 경찰)들의 전략은 언제나 비슷하다. 처음엔 사람의 얘를 태우면서 주민간의 분리를 획책한다. 그러다 어느날 행정명령이란 것을 들고와서 당신들이 하는 일은 법 위반이오 하면서 범법자를 만든다. 그 다음 경찰이나 용역의 동원이다. 그리고 '우린 할대로 다 했는데 너희들이 말을 안들어서다'라는 명분을 세워 철책을 둘러 안과 밖의 사람을 갈라놓는다. 마지막이 침탈이다.

 

 사전에 주민들과의 충분한 대화나 주민들이 마음을 돌릴 기회 등은 일체 주지 않는다. 공청회 비슷한 것도 얼렁뚱당 열며 혹 반대자가 참석할까봐 이것도 봉쇄하에 여는 것이 많다. 공청회가 아니라 그냥 이리할테니 알아서 기라는 식이다. 이전 독재 시대에는 정부의 위압에 스스로 눌려지고 또 요구하면 당연히 해 줄 수 밖에 없다는 식민지 잔재 의식이 자리잡았다. 사회가 바뀌면서 국민의 재산권에 대한 인식은 많이 진전되었다. 그럼에도 정부관료들의 일 처리 방식은 식민지의 잔존인 이전 독재 때의 그방식이 변함없이 나타난다.  그러기에 대추리 사람들의 비극은 대물림하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추리만이 아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 특히 노사와 관계된 문제는 더욱 치열하여 국가간의 전쟁과 비슷하다. 절대 양보없이 오로지 하층민에게만 부당함을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감옥에 가거나 앞으로의 취직이 보장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꽃! 나는 아름다우나 다른 사람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는 그런 꽃이 지금의 통치구조요 자본구조다.

 

 대추리가 그나마 조금 낫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미국의 체면이 조금은 걸려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정부의 강압은 일정 한계가 있고 또 주민들은 최소한의 흩어짐이 있었지만 단결하여 잘싸웠다. 그러기에 먼저 정부 조건을 수용한 사람들은 흩어져 자기 삶을 살게 되었지만 계속 싸운 사람은 집단 거주지를 지어 흩어지지않고 자기마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한가지나 함께 살던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행복이다. 싸움에서 이탈한 사람들도 새 마을에서 함께 하려고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아픔이 있다. 싸우는 과정에 사람들은 언제나 ‘다 죽으려하면 다 산다’라 주장한다. 이 말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싸움에 임하는 자세나 느끼는 두려움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고 각자의 다른 사정으로 이탈을 보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이다. 가장 처참한 전쟁은 원인 제공자를 두고 피해자들끼리 싸우는 현실에 맞닥뜨려 졌을 때이다.

 

아직도 우리 주위엔 집을 잃거나 직장을 잃는 비극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널부러져 있다. 이것은 누군가 이익을 취한다는 단순한 법칙이 아니라 계급의 속성에 기인한다. 박정희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달라졌느냐는 것은 전작 하녀와 최신작 하녀를 비교해 보면 너무도 뚜렷하다. 겁이나고 오금이 저리는 시대다. ‘비극은 이제 그만’하고 외치고 싶으나 바다에 오줌싸기다.

감독과의 짧은 대화였지만 내용을 간단히 싣고 줄거리 등을 둔다.(줄거리는 위로 갔다.^^)

 

 

 

 

***********************************

감독과의 대화

질문 - 대추리를 찍게 된 계기는

감독 - 푸른영상에서 다큐를 찍고 있엇는데 2006년 대추리 문제가 언론에 크게 보도 ‘ 학교 강제 철거’하고 주민들 못 오도로 철조망 두르는 강제집행을 했다. 그전부터 관심가지고 들랑날랑했다. 그러다 결심하고 ‘대추리전쟁’ 다큐 만들었다. 나중 교류안되고 고립된 상태에서의 1년 동안은 주민과 같이 지내면서 작업하게 되었다.

 

문 : 대추리에서의 생활은?

답 : 시골마을 치곤 대게 크다. 100가구 넘는다. 마을 고립 이후 오전 일어나면 마을 돌고, 회관 노인정에서 앉아 노는 등 특별히 할 일 없다. 지킴이와 술먹고 농사구경하거나 도와주기도 하고 보통날들로 지냇다.

 

문 : 카메라 찍는 것 싫어할낀데 힘든일 없었나?

답 : 처음 나를 모를 땐 진짜 싫어했다. 싸움 벌어질 때 찍히는 것은 특히 더 그랬다. 나중 기자들 많이 오고하니 적응 되는 것 같더라.

 

문 : 경찰과 이야기 나눈 적은?

답 : 많이 찍기도 했다. 나중 마을 피폐되었을 때 어쩔 수없이 지켜보는데 그를 때 이야기 많이 나누었다. 경찰들도 생각이 다 다르다. 미안하다는 사람도 있어도 주민을 억수로 미워하는 사람도 많다.

 

문 : 광화문 시위 장면에서 지붕위에서 시위자들을 끌고 가는 경찰들에게 ‘몸에 손대지 마라’고 한 사람은 감독님이었나?(감독이 혹 흥분하여 시위에 뛰어드는 형태가 되었느냐는 의미)

답 : 지킴이 도와주는 활동가의 소리였다.

 

문 : 이주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지킴이들은 어디서 활동하고 있는가?

답 : 공동이주단지로 협상이 되었기에 중간엔 임시거주 빌라촌에서 지냈고 지금은 거의 완성단계다. 가을엔 완료될 듯 하다. 마지막 버틴 주민에 한에 공동이주단지로 이주를 약속했기에 중간 이주자와 사이가 벌어졌다. 협상했다하여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먼저 간 사람들 들어오고 싶어 한다.

지킴이들은 이전 직장으로 돌아갓고 정혜씨는 여전히 양산이주노동자 활동중이고 용산에서도 활동한 친구들이 많다.

4~5일 정도는 다 나가고 지킴이들만 머문 시기도 있었다. 출입금지구역 침입죄로 잡아갈 수도 있고 물, 전기도 없는 상태였는데 잘지냈다.

 

문 :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안생길까?

답 : ^^

잘 안잊혀진다. 우리끼리는 ‘대추리 병’이라한다. 매일매일 파괴되는 모습과 포크레인, 헬리곱터. 공포의 연속이었다. 상담받으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 생각하기 싫었던 시간인 것 같다. 받아드리기 어려웠던 시간들이었다.

 

문 : 경찰 폭력에 찍다가도 울컥 안했는지?

답 : 5월4일 행정대집행으로 학교강제철거하고 마을에 철조망 칠 때 찍으면서 많이 울었다.

끝나고 주민들이 각자 물건을 마을에 묻는 식 거행할 때도 계속 울었다.

 

문 : 어떻게 생계유지 했나? 뭘 먹고 살았나? 다큐 계속 찍을끼가? 찍는 이유는?

답 : 생계? 다 가난하다. 대추리에서 돈 쓴 기억 거의 없다. 얻어먹었다. 대추리 나오니 생활비 많이 들더라. 다큐는? 글쎄요. 알바하면서 살고 있는데 잘살고 있는지 깜빡깜빡한다. 다큐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은 든다. 인터뷰 공개 못한 것 있는데 공감대 형성의 묘한 느낌 들 때가 있다. 대추리에서 한두우명 속의 깊은 이야기를 한 분도 있는데 이 땐 쾌감 같은 것 많이 느낀다.

 

문 : 처음 시작할 때 대상과의 관계 중요할 듯 한데 어이 하나?

답 : 가만 있는 편이다. 가만있으면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술 이용도 많이 한다. 사람마다 달라서 분위기 봐 가면서 한다.

 

문 : 찍기전 허락 받고 하나?

답 : 그렇지 않다. 상대가 뭐라카고 싫어하지만 찍은 화면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생각하면 찍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지작 거리면서 고민하면서 반응 본다. 묻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문 : 대추리 - 대학전엔 몰랐다. 앞으로 관심있는 주제는?

답 : 현재는 특별히 없다. 많이 생각 안해 봤다.

끝까지 봐 줘서 고맙다. 중간에 많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 마음 아프더라도 지나온 것 잘 기억하면 조금이라도 도움될 수 있다고 본다.

 

감독과 한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