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의 랑데뷰

무거운 빈가방 2015. 8. 24. 00:30

파리의 랑데부 (1995) Les rendez-vous de Paris Rendezvous in Paris

 

https://www.youtube.com/watch?v=nCSef-CLZ80

 

https://www.youtube.com/watch?v=iB8DUvcvO6I

(1부 7시의 랑데뷰 끝장면이다 - 같은 남자를 향해 다른 목적으로 가는 두 여자)

 

요약정보 코미디, 로맨스/멜로 | 프랑스 | 100 분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클라라 벨라 (에스더 역), 앙뜨완느 바슬레르 (오라세 역), 마티아스 메가르 (플리르 역), 쥬디트 샹셀 (아리시 역)

줄거리

공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한 에릭 로메르 감독이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사랑을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작품. 남자친구가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낭만적인 복수극을 담은 '7시의 랑데부', 독특한 연인 관계인 남녀가 등장해 우스꽝스런 소동을 그린 '파리의 벤치', 화가와 두 여인이 그림을 주제로 벌이는 미묘한 이야기 ‘어머니와 아들, 1907’이 담겨 있다.

 

이영화의 키워드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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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벨 바그가 뭔지 모랐다. 이번에 로메로 전을 보면서 찾아보니 그 내용이 있더라. 로메르를 보면서 누벨바그가 뭔지 많이 이해가 되었다.

 

몇편의 영화를 보면서 모두가 좋아하는 로메르의 위대함이 뭔지 표현하기 어려웠다.

영화가 즐겁고 좋기는 한데 그리고 이야기 하는 의미도 좀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가 말하는 많은 대사들에게 젖어지기도 하는데...

위대한 작가의 뜻을 잘모르지만 그냥 글을 적엇다.

평론가 강소연 선생은 '모르면서 적엇네'라고 가슴아프게 콕 찔러 버린다.

그래도 모를 때가 제일 용감할 때다.

줄거리로 보면 안된다는 로메르의 영화를 줄거리 중심으로 그냥 적어 보앗다.

속으로 기분 좋으면서....

작년에 녹색광선을 처음 보고 홍상수감독을 더올렸다.

이번에 3편의 로메르를 보면서 차이점을 어렵풋이 느꼈다.

담엔 조금 더 보게되겠지..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파리의 랑데부>(1995): 최후의 누벨바그를 느끼다 민병창

‘에릭 로메르’(1920~2010)는 1950년에 데뷔 한 이래 생애 40여 편의 영화를 남겼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역임(59~63)하면서도 꾸준히 활동하였다. 저예산으로 찍었고, 주로 무명 배우를 기용하여 그들과 토론을 통해 충분히 교감을 나눈 후 만들었다. 그랬기에 그는 삶과 사랑, 이기심, 허세 등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사소한 것 까지도 담아내면서 구성과 내용을 일관성 있게 작품 속에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파리의 랑데부>도 이런 일관성에는 변함이 없다.(<1>'7시의 랑데뷰' <2>'파리의 벤치' <3>'어머니와 아들,1907') 모두 남녀의 사랑이 중심이고 보여주는 내용이나 방식과 인물은 다르지만 자연스레 연결도 된다. 주된 인물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소문에 흔들리는 여성<1>, 동거하는 남자를 두고 대타로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여자와 대타<2>, 친구의 부탁으로 외국여성을 안내하다가 길 지나는 여인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자화가<3>이다. ‘바람둥이 같은 남자의 마음을 안 여자<1>는 언젠가는 남친이 떠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대타를 만나다 차버리고<2>. 대타로 상처입은 남자는 마음을 닫고 여자를 멀리해도 여전히 여러 다리를 걸치려 한다<3>’로 연결지어 읽어도 통하며 상처를 주고받는 묘한 연애의 세계를 좀 더 상상해 볼 수도 있는 재미가 있다.

<1>의 배경은 집과 파리 시가지이지만 <2>는 파리 주변의 공원이나 묘지, 길 등이다. 특히 몽마르뜨언덕에서 바라보는 길게 뻗은 골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복잡한 파리 시가지와는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화가<3>의 ‘하늘과 수평선’ 그림에서 나타난다. <3>은 화가의 집, 피카소미술관과 두 곳을 연결하는 길을 배경으로 그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직업과 연관지어 비교하기도 한다. 피카소의 작품명이 제목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 장소들을 통해 파리를 살펴보고 예술이나 사람 그리고 거리나 역사적 유적 유물에도 사람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는 다양성을 보여주려 한다. 피카소의 그림조차도 ‘피카소답지 않다’, ‘빛과 공간을 빠뜨렸다’ 등의 의견을 제시한다. <1>에서 미로, 팝아트 같은 것을 슬쩍 보여주다가 <2>에선 고대조각, 삽화화가 스탱랑, 피카소나 입체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3>에선 피카소를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주인공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이 모든 것들도 남녀의 상호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일어난다.

로메로는 시간이나 현실과 꿈을 교묘히 섞어 놓거나 공간을 집중적으로 반복해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사는 그대로인 듯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공간도 지나치는 한 부분이다. 사람들의 대화는 일방적이거나 듣기만 하는 경우가 없고 주고받는다. 여자나 남자가 서로를 탐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합리화나 강한주장 사랑의 표현 등 일상적인 일들을 다룬다.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고 만남이 소중하고 예술이든 사랑이든 살아있는 현재의 사람들의 관계에서 풀려고 한다. 주변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이유도 현재 내가 사는 이곳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상대적으로 조금 자유로운 젊은 중산층을 주로 다루기에 대체로 활기차다.

‘누벨바그’를 ‘영화산업의 틀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영화제작, 사실적 구성, 즉흥적 연출 등의 방법으로 개인적이며 창조적인 영화들을 탄생’시킨 운동이라 말한다. 최근 영화의 전당 ‘여름특별전’에서 본 <내 친구의 남자친구>(1987),<여름이야기>(1996),<파리의 랑데부> 이 3편만으로도 에릭 로메르가 ‘최후의 누벨바그’라 불리는 이유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은이들의 사랑과 질투와 우정을 묘사하고 현재를 표현해 내는 감독의 일관된 의지와 정열은 일상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되고 여기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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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대정신은 죽지 않는다

 

요즘 정치, 예술,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바르고', '아름답고', '명확하게' 사고하기를 강요받아서일까? 에릭 로메르(1920~2010), 크리스 마커(1921~2012), 알랭 레네(1922~2014) 같은 누벨바그의 주요 멤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등지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새 영화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거라는 박탈감보다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건 이들이 젊은 감독으로 왕성히 활동했던 1950~80년대의 자유, 반항, 전복, 일탈, 도전 등이 역사의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뿐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가끔 사고(?)까지 치는 장 뤽 고다르나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설치미술, 사진, 극영화,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아녜스 바르다를 보면 적잖은 위안을 얻는다.

 

지난 730일부터 파리의 MK2 보부르, 르플레 메디시스 극장에서는 아녜스 바르다가 1960년과80년대 당시 미국에서 연출한 다섯 작품을 디지털 버전으로 복원해 상영하고 있다. 1967년 당시, 바르다는 < 로슈포르의 연인들 > (1967)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눈에 띈 남편 자크 드미의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미국에 갔다. 드미가 대규모 할리우드의 시스템에 적응하려고 진땀을 빼는 동안, 바르다는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번 상영작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화가로 활동하면서 히피 문화에 흠뻑 빠져 살고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친삼촌, 장 바르다에 관한 인물다큐멘터리 < 얀코 삼촌 > (1967), 백인 경찰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블랙팬서의 리더 휴이 뉴튼 석방 운동을 기록한 < 블랙팬서 > (1968), 케네디 암살 당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성감독과 두 남자배우와 한 여배우의 기묘한 동거를 다룬 < 라이언의 사랑 > (1968), LA의 벽화를 통해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찬찬히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 , 벽들 > (1980), 남편과 헤어진 프랑스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머물 곳을 찾아 거리의 이곳저곳을 헤매는 여정을 다룬 모큐멘터리 < 다큐멍테르 > (1981) 등이다.

 

에릭 로메르는 다른 누벨 바그 감독에 비해 훨씬 뒤늦게 알려졌지만 '최후의 누벨 바그'라는 말을 들을만큼 가장 지속적으로 누벨 바그 영화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18세기 철학자 파스칼, 라브와이예르, 라 로슈푸코 등과 같은 '도덕주의자 Moraliste'의 실천을 영화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로메르는 사소한 대화장면에서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영화기법과 정신의 소유자였다.

 

1920년에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난 로메르는 장-마리 쉐레가 본명이고 나치 점령기에는 질베르 코르디에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썼다. 50년부터 에릭 로메르라는 이름을 걸고 영화평론을 했는데, 클로드 샤브롤과 함께 로메르가 쓴 알프레드 히치콕 연구서는 이 분야에서는 선구적인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59년부터 63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역임한 로메르는 그 사이에도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50년대부터 단편영화를 연출한 로메르는 62'로샹쥬 영화사'를 차리고 영화를 만들었다.

로메르 자신이 '여섯개의 도덕이야기'라고 이름붙인 연작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였던 <몽소 빵집><수잔느의 가방>은 그저그런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1969년 모드의 집에서 보낸 하룻밤의 이야기를 그린 <모드 집에서 하룻밤>이 흥행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내며 로메르의 명성을 입증한다.

70년대 중반에는 유명한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를 찍었고,80년대부터 다시 새로운 연작을 풀어놓았다. <비행사의 아내>, <해변의 폴린느>, <달밝은 밤>, <내 친구의 친구>, <봄 이야기>, <겨울 이야기>, <여름 이야기>, <녹생광선> 등의 많은 작품을 연출하였다. 세계적인 거장이 된 로메르는 <해변의 폴린느>1983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였고, 1986<녹색광선>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많은 영화제들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예산으로 무명 배우를 기용하고 그들과 토론을 통하여 충분히 교감을 나눈 후 영화를 만들며 인간들의 마음을 영화안에 담아냈던 그는 2010111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후의 누벨바그 감독이라 불리기도 하는 ‘에릭 로메르’(1920-04-04 ~ 2010-01-11 )는 어느 정도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다. 그는 90여세 까지 살면서 4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1950년에 데뷔 했으니 1년반에 한편씩의 영화를 꾸준히 만든 셈이다. 그의  작품은 일관된 구성과 내용을 가지고 (진 것으로 유명한데 하다.) 저예산으로 무명 배우를 기용하고 그들과 토론을 통하여 충분히 교감을 나눈 후 영화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안에는 소소한  삶과 사랑, 이기심, 허세 등 인간들의 마음을 담아내었다.

 <파리의 랑데부 Les rendez-vous de Paris>(1995) 도 이런 일관성은 변함이 없다. 76세의 나이에 여전히 젊은 이들의 사랑과 질투를 묘사해낸다는 것은 감독의 굳은 심지와 정렬을 충분히 느낄 수 잇다.   말할 수 잇는 정열은 있겟지만 여기서 잠시 소개한다.

59년부터 63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역임한 로메르는 그 사이에도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저예산으로 무명 배우를 기용하고 그들과 토론을 통하여 충분히 교감을 나눈 후 영화를 만들며 인간들의 마음을 영화안에 담아냈던 그는 2010111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 <1>'7시의 랑데뷰' <2> '파리의 벤치' <3> '어머니와 아들,1907' 등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잇다

<1>에서 <3>의 내용은 모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주제다. 그런데 다루는 형태가 조금은 다르다 <1>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의심스러 s말로 흔들리느 s여자의 마음을, <2>는 동거하는 남자를 두고  대타로 다른 남자를 여자의 모습을, <3>은 남자화가가 친구의 부탁으로 외국여성을 안내하다가 길 지나는 여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담고 잇다.

<1>의 배경은 집과 파리 시가지이지만 <2>는 파리 주변의 모습이 이런것이다고 마음껏 보여주는 양 공원과 길을 담아 놓는다. 중간과 마무리에서 보여주는 세탁선(bateau-Lavoir)과 길게 벋은 직선 골목 길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과 복잡하 s파리 시가지와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도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멀리 지평선 아니면 수평선이 보이는 공간처럼. 이 느낌은 <3>의 화가가 그린 자연에 대한 그림에서 많이 나타난다.  <3>은 화가의 집과 피카소관, 둘을 연결하는  길이 주 배경인데 주로 그림에대해 사람이 가진 특색을 보여준다. 주 대상은 '피카소'와 자신의 그림이다.

 <1> 사랑은 운명적인양 애인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자부하는 ';에스테르'는 다른여자를 ㅁ만난 다는 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많은 듯 해야 고나계가 오히려 돈독해진다고 조언한다. 시장에서 잃어버리 ㄴ지갑을 찾아준 여자의 약속 장소와 시간이 애인이 ㅆ을 가능성이 많아 둘은 같이 그곳으로 간다. 한남자와 그의  오래된 애인과 새애인이 한자리에서 만난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운명도 바꿀 수 잇다는 듯 에스테르는 애인을 차버린다. 에스테르의 방에 걸려있는 그림으 ㄴ'미로'의 것으로 보이고 방에 붙은 깃발은 제니퍼 존슨의 '국기'와 '4얼굴과 타겟'의 조합으로 보인다. 감독은 <1>을 통해 초현실주의나 팝아트 같은 20세기 예술에 관심이 잇음을 은근 비춰 준다. <2>는 <1>에서 남자에 실망하 ㄴ여자가 남자의 애르 ㄹ태우는 듯 진행된다. 이들으 ㄴ날마다 공원이나 길에서 만나는데 중심가에서 약간은 벗어난 공원들이 중심이다. 그리스-로마 시노하가 아로새겨진 동상이나 새들에 대하 ㄴ이야기 (공원, 묘지, 저수지, 가난한 화가들의 거리 몽마르뜨 등

남자는 여자에 대해 애가 닳아 가급적 깊은 스킨싶을 하고 싶어하지만 여자는 매우 단순한 변명르 늘어 놓으면서 피한다. 장소가 마음에 안든다 아직 애인이 잇으니 시간이 좀 더 지나야 되지 ㅇ낳겟느냐는 등이다. 그런데 10여차레 만남으 ㄹ통해 밀착도는 조금식 높아지고 자연스레 키스도 하여 이제 얼마안잇으면 맺으질 것 같은 ㅇ니상을 준다. 그러다 세탁선에 있는 그 몽마르드언덕의 호텔에서 2박3일을 보내자 제안을 한다. 이젠 둘의 사랑이 무르익는 확인의 시간마 ㄴ남으 ㄴ듯 하다. 둘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여자의 애인 이 다른 여자와 호텔엘 들어간다. 남자느 이제 애인에게서 벗어나겠구나고 좋아하지만 여자는 애인과 너가 서로 엮어 잇는 관게인데 애인이 날 더낫으니 나느 널 떠나겠다면서 가버린다. 참 터무니 없는 말들로 거리를 두더니 헤어지는 것으 ㄴ더 허무하다. 남녀의 고나계는 이론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몽마르뜨에서는 피카소의 작업실 , 몽드리안 등 작품들으 ㄹ잠깐 보여준다. 묘지에서 보여주는 고양이 삽화로 유명한 스탱랑 무덤... 파리라느 ㄴ도시에 숨겨잇는 과거와 현대의 예술들을

 

은근슬쩍 들려주거나 보여주던 그림들에 데해 3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룬다. 물론 남녀 문제가 가장 기본 바탕이다. 고나광안내르 ㄹ부탁받은 스웨덴 여자에게 살작 스킨쉽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의견으 ㄹ피력하는 ....

그는 약간이라도 자신을 이해 못하면 상대를 싫어하는 찌질남에 가깝다.여자를 피카소미술관 입구가지만 안내해주고 돌아가다가 피카소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보고 반해 따라간다. 그녀는 피카소의 '어머니와 아들'; 그림앞에 앉아 깊은 감상을 하면 ㅜ먼가 뜰적댄다.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스웨덴에게 들켜 그녀에게로 가서 피카소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낟. 그리고는 다시 여자쪽으로 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여자가 듣도로 ㄱ자신의 그림에 대하 ㄴ이해도를 으시되듯.. 여자가 나가자 다라 나가 여자와의 미팅을 시도한다. 잠시 자기 화실로 와서 그림에 대하 ㄴ설명...

여자는 오지 ㅇ낳는다.   아무 눈치 없는 사람으 ㄴ없다. 내심 양다리 걸치지만 상대는 그것을 직감한다. 내가 아무리 충실하려 해도 상대의 마음이 덜하면 이어질 수 없다. 사랑은 참으로 묘한것이다. 파리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나 친밀한 사람과의 랑데뷰를 시도해도

 

로메로의 영화는 참 일상적이다. 많이 닮은 홍상수의 영화에는 시간이 거슬러 가거나 시가닝 흐트러지고 자주 ㄲ무도 등장한다. 두감독은 모두 다 저에산영화를 추구하는 것으 ㄴ같다. 홍은 전문배우를 기용하고 로는 그렇지 않다. 호으이 이런 복잡한 구성들과는 달리 그냥 시간이 흐르는 순서다. 그리고 남녀가 끊임 없이 대화를 한다.누구 하나 일방적으로 듣는 경우가 없다. 주고 받듯 대화를 나눈다. 정치를 이야기하거나 국가를 논하거나 세상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냥 여자를 남자를 탐하는 사춘기의 모습들 처럼 . 로메로는 우연히 마주치는 모드 것들이 다 의미가 잇고 가장 중요한 것으 ㄴ남녀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이곳(파리 중심)이 갖아 중요하다는

 

 

 

 

세탁선(bateau-Lavoir)

 세느강변 빨래를 하기 위해 떠다니는 배모양과  집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이래요

 집값때문에 파리 시내에서 살수 없던 예술가들이 집값이 저렴한 몽마르뜨 언덕으로 오면서부터

 예술가들이 많아져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네요 피카소가 이곳에 화실을 차리면서

 유명세도 탔다고 하더군요.

 [출처] [FRANCE] 셋째날 :: 몽마르뜨 언덕 (사랑해 벽. 세탁선)|작성자 강느님마늘

 

 입체파   동의어  큐비즘, 입체주의 다른 표기 언어 Cubism , 立體派

 유형  개념용어    별칭  큐비즘, 입체주의    분야  예술·체육/회화

 

정의

 20세기 초 서구미술의 전면적 혁신을 가져온 미술운동.

 연원 및 변천

 

 

입체파(Cubism)라는 용어의 기원은 190811월 다니엘 칸바일러(Daniel Kahnweiler)의 화랑에서 열린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레스타크(L'Estaque) 풍경화 전시에 대한 리뷰에서 루이 복셀르(Louis Vauxcelles)가 “작은 입방체들(little cubes)”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입체파는 색채와 질감을 제한하고 대상을 단면으로 분해한 분석적 입체파에서 콜라주라는 새로운 기법이 구사된 종합적 입체파에로의 과정을 거치며 전개되었다. 입체파는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 등 20세기 전반의 미술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술사학자들은 대체로 입체주의가 서양미술에 전면적 혁신을 가져왔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예컨대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은 그것이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의 발견에 버금갈 정도로 혁명적”이라고 하였고 마크 앤들리프(Mark Antliff)와 패트리샤 라이튼(Patricia Leighten)은 입체주의가 “단지 그 후의 회화, 조각, 사진만이 아니라 건축 그리고 가구, 의복, 일상용품에 이르는 모든 것의 디자인까지 변모시킨 조형혁명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입체파라는 용어가 한국미술계에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초이다. 1922년에 철학자 박종홍은 『개벽』4월호에 실린 「조선미술의 사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신미술의 새로운 운동으로 인상파가 일어나고 입체파가 탄생하며 미래파의 절규하는 바는 동양 미술을 능가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입체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삼천리』19323월호에 실린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이라는 글에서 여성화가 나혜석(蕙錫)은 입체파에 대해 “입체파의 화면에는 색채의 교차, 운동감, 구성이 가득했다. 입체파의 대표자는 피카소와 브라크이다. 입체파는 야수파가 직감을 중시한 결과 너무 단순화하여 지식을 부정하므로 이에 반하여 모든 지식을 토대로 하여 미술을 건설하자는 것이다”라고 소개함으로써 피상적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입체파에 대한 한국 미술계의 반응이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1932년에 화가 김주경(金周經)은 「화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입체파에서도 순수한 피카소적인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것은 입체파가 조선의 민족적 입장이나 민족성에 맞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1939년에 오지호(吳之湖)도 자연의 형태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회화가 입체파 등장 이후 혼란을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피카소는 예술적 가치를 갖기보다 세상을 우롱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김환기(金煥基)는 “현대 전위 회화의 그 주류는 직선, 곡선, , 입체 따위의 형태를 갖춘 것이며 입체파야말로 순수 회화 예술을 추구한 것인데 지금의 모든 전위 회화는 입체파를 통과한 회화 정신이 있으므로 근대예술을 현대 예술로 계승한 것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김환기를 비롯한 유영국(劉永國), 이규상(揆祥) 등은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입체파에서 파생된 기하학적 추상작품을 제작하여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입체파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는 1950년대였다. 1950년대 전반에는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래주의 등 세잔 이후 서구의 현대미술에 대한 소개가 문예잡지를 통해 많이 소개되었다. 대부분 1950년대에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일제강점기부터 활약했던 중진급 화가들이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함대정(咸大正)의 「소」(1956)는 대상을 날카로운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하고 대상과 공간을 통합하며 마치 조각과 같은 물리적 존재를 느끼게 하여 브라크가 레스타크에서 작업한 1908년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한묵(韓默)의 「가족」(1957)도 인물과 배경이 단순한 기하학적 면으로 분해되고 있어 브라크의 1930년대 작품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 밖에 변영원(邊永園)의 「반공여혼」(1952)은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의 영향을 보여주며 박영선(朴泳善)의 「파리의 곡예사」(1957)는 피카소의 「곡예사의 가족」(1905)이나 들로네의 「파리」(191012)를 결합시킨 느낌이다. 1950년대에는 동양화가들 사이에도 입체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 박래현(朴崍賢)의 「노점」(1956)은 인물과 주변의 배경을 기하학적으로 분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가들의 입체파 시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다. 이들은 입체파를 대상을 작은 기하학적 단면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 한국 작가들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형태가 보이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입체파와 다른 차이를 드러낸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앵포르멜 미술이나 추상표현주의가 소개되면서 입체파에 대한 관심은 식게 된다.

  

의의와 평가

 입체파는 미술작품이 실재의 거울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의미를 갖는 미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또한 다시점과 경험의 지속을 통합함으로써 근대 도시의 변화된 삶의 조건과 그러한 공간 속의 역동적 경험을 드러낸 미술이었다. 한국의 입체파 미술은 외부의 세계를 묘사하는 사실주의에서 추상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대와 신세대 교체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핸드레일?   소소하 s대화 우지 이리 다양하노미술에 대한 두가지 관점 반대편 생각들을 계속 쏫는다   공원이나 연애 방법에 대해서도 일방적 이야기는 거의 없다 주고 받는 대화다 남자와 여자의 바람기에 대해서  공원등은 파리 주변을 보여 주고 싶은 듯 하고

그림에 대한 그리고 그 속에 남녀의 마음에 대해 표현 하고 싶은 듯

 

<3> 뒷 이야기

여 다 당신작품? - 그렇지 않게 보이냐? - 그렇다

 

스케치북 본다, 다 최근? - 에전 그림은 선반에 있다

: 이건 연구작업인가 회화인가?  돌과 나무 보고 남 연구작업 살 순 잇다.

남 이런그림 잘안팔리죠? 사진적이죠?               - 그런 이야기 않했다 - 사진적이다

남 나는 카메라 풍경 앞에 서면 나 자신이 카메라가 되고 나중에 스튜디오에 와서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만약 풍경이 완벽하다면 내가 왜 그걸 수정하겟나?

여  극사실주의 화가인가남 아뇨 극사실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달했다 나는 게속 조사하고 있다  이 풍경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풍경이 뭔가 이야기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거다 여 - 연결점을 못찾겠네요 - 이제 이해할지도 몰라요(하늘 그림으로 델고 간다백사장 - 파도 =하늘 구름

남 “ 여기도요 저는 공간과 하늘, 수평선에 공을 들여요

단순히 빛을 통해서 지구가 구부러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피카소가 빠드린게 잇다면 빛과 공간이다 어쩌면 피는 사진에나 잘맞을거라고 생각햇을지도 모린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카메라가 되는게 아니다 오나전히 다른 무언가다 잘전달?  -  여  대충 이해, 당신이 조사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주류 취향은 아니네 하지만 현대화가 쉽게 판단 못하것다  방해 미안 남  낯선 사람에게 작품 보여주는 것 좋아한다 여 아니 금발소녀와의 풍경을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의미

남 그건 풍경 아니다 그녀에게 관심 없다 모델로 관심이면 몰라도 피라면 그녀의 그림을 그렷을거다               여 - 나쁘네              

- 왜요? 피카소는 아름다운 여성만 사랑했어요  그녀가 도라 마르 아니면 자클린을 닮앗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도라 마르(1907-1997)는 프랑스 파리 출생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성장했습니다.

피카소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유명한 사진작가였습니다. 1936년 그녀가 30살때 55세의 피카소를 취재차 만나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9년간 이어진 그들의 연인관계는 마르보다 먼저 있었던 피카소의 연인, 2살 연하의 마리 테레사 왈터와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는 장면까지 연출하며 살다가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이 생기는 1943년 정도에 헤어지게 됩니다. 헤어지면서 피카소는 도라 마르를 정신치료를 받게하고 그의 작품들을 이별선물로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녀는 90세로 죽기까지 피카소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피카소와 헤어진 후 그녀는 다시 재기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회활동도 하면서 특히 종교에 귀의해 피카소 이후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After Picasso, God!) 그녀가 쓴 시는 종교명상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피카소의 여인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사진작품을 만들었고 시를 썼고 그림을 그리며 1990년에는 그녀의 그림전시회를 가졌고 죽기 2년전인 1995년에도 그림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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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Portrait de Dora Maar), 1937

우는 여인 초기 작품 /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Weeping Woman with Handkerchief) 1937,

1953'프랑수아즈 질로'와 헤어진 뒤, 1954년 발로리스 도자기 공장에서 '자클린 로크'를 만나 1961년에 결혼하여 평생 그녀와 함께 보냅니다. (중간에 막간을 이용해서 아래의 "실베트, 1954"라는 말총머리 어린 여인과 사귀기도 합니다만)

 

3번째 에피소드의 대화 하나.

 

; , 눈 한쪽을 정면에서 그리고 다른 쪽을 을 측면에 그리면 되겟죠 당신은 결혼해야해요

 (- 너무 남의 여자에게 두리번 거리지 마라는의미?) - 너무 빠르지 않나요?

- 날 그려볼 생각없나남 잇다  하지마 s당신 봤을 때 화가의 관점에서 본건 아니다

 

여 여친이 불안하게 만드나 봐요 남 설마요 당신 보다는 안그래요, 그런 타입과는 잘안된다 - 어떤 타입? - 여행자 타입 - 나도 여행자다

남 아니잖아 해줄말 있다. 스무살 때는 외국인 많이 만낫으나 잘된것 하나도 없다. 내가 그들 타입이 아니었겟지만 그들역시나다. 새로운 사람 만날 때마다 복수안하도록 조심해야했다.

결국 마음의 문 닫앗고 자기나라로 돌아갈 상대방과 시간을 낭비하겟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