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등

한창호 평론가의 낭만주의 강의 1

무거운 빈가방 2015. 9. 8. 00:07

 

블로그 안올린지 제법 되었다.

안하다 보니 하는게 귀찮아 지는 듯 하다.  굳이 고민할 필요없으니 편하기도 하고

영화의 전당에서 토,일요일 오후에 한창호 평론가의 강의 가 있다.

주제가 낭만주의에 대한 것인데 첫번재 강의를 정리해 보았다.

빠진 것도 제법 있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되어 올린다.

강의 의도와는 달리 잘못 적은 것도 있을 순 있겟으나 이 정도로 만족하자 싶었다.

한창호 평론가의 강의는 참 재미있다. 그래서 잠이 안온다 ^^

 

******************************

 

한창호 낭만주의

19c 서양미술 태마를 영화에서 어이 볼 것인지?

현대성이 있어서 택했다.

1990년대

911이후 어떤 사실이 발생할 때마다 합의된 의견 도출이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고 이런 현상들이 일어남

철학적 입장에서 윤리학의 위기

과거엔 선과 악이라는 합의된 이념이 잇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굿인지 배드인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아주 교육 수준 낮은 사람 제외하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시대다

제일 가까운 시대가 19세기 인듯

낭만주의 나 포스트모더니즘 공부자가 관심이 많은 영역이다.

1800년대 무슨 일 있었나?

마치 현대인에게 냉전이 무너지면서 냉전은 답답하지만 합의된 도출이 쉬웠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무너지면서 굿앤 베드 판단 어렵게

최근 여러(???) 현상이 일어나면서 옳고 그르던 견고했던 합의 깨어지니..

19c가 그렇다

프랑스 혁명 이후 당연히 받아들였던 왕권체제 무너진다. 모든게 그렇듯 한꺼번에 이뤄진 것들이 아니다. 무너지고 보수화 반동 다시 반동 등... 이게 19c 역사다

합의된 도출이 더 어려워지게 되엇다.

현재 삶과 연관 많음. 19c 이전세기 18c 무슨 일 일어났는지? 18c 결론은 혁명이다. .. 18c 시기 알면 19c 효과적으로 알 수 있을 듯.

계몽주의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나 ?

계몽주의 그리 좋게 생각안하는 경우도 잇다. 순기능이 많은데.. 과연 그런가 라 생각한 것이 낭만주의 사람들이다.

계몽주의 로코코미술과 영화

<배리 린든> (1975) Barry Lyndon - 스탠리 큐브릭

신분 사회. 법적 존재 아니지만 혁명와야 깨어짐. 혈통 안좋으면 안유리

태어나는 순간 나의 운명이 정해짐

지금도 있지만.. 아직 발전 덜된 인류문명

 

앙투완 와토의< The Feasts of Venice, 1717>

 

램브란트 1650 <man in a gold helmet>

 

 

로코코 남자나 여자나 이쁜 옷. 다른 역사에 비해 굉장히 이쁜옷이 발달 . 모짤트 시대 <베니스에서 축제> 속세 사람의 일상 즐거움 쾌락..

18c 이전 바로코시대 .

결정적인것은 종교가 물러남

전쟁. 삶이 휑하니 잘표현된 그림. 바로크 분위기 비장하고 마치 즉을 것 처럼

로코코 오니 세상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넘어감. 여성은 그런 느낌이 덜함. 억압적이지 않고 편안함. 베니스는 유럽에서 가징 자유로운. 섹슈얼리테에서도 상대적으로 억압이 덜함. 다른 나라는 좀 다름 베니스와는

계몽주의 로코코시대 불세출의 사나이 ‘카사노바’ 나옴

아마데우스도 그시절

세상이 바뀐데는 여러 이유

정치권 영향 더 받은 시대인데 30년전쟁이란 큰 전쟁 일종의 종교전쟁. 대리전쟁임

끝난 다음. 유럽의 대전.. 많은 나라 참전. 영국의 압도적 위치에서 1648년 프랑스 태양왕 등장 루이14세 . 절대왕정이 열림. 교항은 떠나게 되는 시대. 역전 됨.

예술적 표현도 종교나 교황 위한 것 보다 세속적 권력 가진 소비층에 관심. 급격히 세속화됨. 더 이상 죄책감 느끼는 예수나 마리아 그만 그리고 내 그림 살수 있는 사람 위해 그림. 귀족이 가장 큰고객. 이들이 좋아하는게 사랑...과거에 비해 달라짐. 프랑스에서 주도 로코코. 왕족과 귀족. 최상층 브루조아들.. 소비층.

와투는 프랑스 사람인데 . 휴양지 베니스 지금도 축제 많은데 역시 그때도 즐김.

영화 :<배리 린든> 계몽주의 시대 아일랜드

파트1 나레이션, 결투.베리. 베리엄마. 카드놀이 남녀 둘. 양국 풍경화 떠오르게 설정 대위.

이전에도 종교는 있지만 개방적

계몽주의로 넘어오면 화려해짐. 도끼질 친구(영화 내용)도 셔츠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최고 멋부리던 시절. 복장에서.

스탠리 큐브릭 ㅡ 미국사람 . 유럽적 취향 강함. 70년초 쯤 런던으로 거처 옮겨 작업

완벽주의자로 유명. 라이언오닐.. 측은한 마음. 큐브릭과 찍으면.. 얼반 죽음. 나오면 전세계적 스타가 되는 것인데....

99년 세기말에 아이즈 와이드 셧 (1999) Eyes Wide Shut

마지막 영화. 그 땐 디지털도 좀되고.. 톰크루즈가 나옴9뭔가 늬앙스 있었는데....)..

 

watteau <The Embarkation For Cythera, 1717>

 

 

watteau <the bluder 1718>

 

그리스 조그만 섬 시테라섬.

비너스 탄생한곳. 에로스의 성지. 상상화이다 . 프랑스 남녀가 소풍. 상상발휘 이상화시킨 것. 노골적 사랑 표현. 복장 자유. 전체적 경쾌 부드러움. 정치문제는 서서히 변하지만 확 안바뀜. 시간 걸림.

1714 루이 14세의 죽음. 모든 귀적들이 다 무서워 햇음. 절대권력 아래 있었으니

베르사이유 귀족들이 다시 파리로 돌아옴. 와토의 저런 그림들 좋아함. 램브란트 그림은 사라짐. 당시 파리 귀족들이 프라이드 생김. 한명의 왕이 만든 권력 문제된다 생각을 할 듯. 이 때는 왕정에 충성.. 부르봉 왕정.. 기왕이면 덜억압받는 방법없을까? . 정치시스템 연구 시작. 그리스 연구.. 볼테르 몽테스퀴외 등 계몽주의들이 자유 평화 권리 보장 받으며 유럽에서 프랑스가 계속 권리 가질 수 있을까? 요것이 계몽주의다.

일루미네이션. 스스로 빛 내는 것

뉴일라이트먼트(유럽) : 빛 비춰주는 것. 의미 다름

비이성적 구분 신비주의 구분을 하나씩 걷어냄

‘이성’이 굉장히 고귀한 가치가 되고 이성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리전..

인과율 적으로 생각한다. 리전하면 막연한 고정관념 과거 잘못을 하나식 뗄 수 있다

예술에선 아주 자유로움 상상 형성하는 시대됨.

이전 선배들은 이런저런 눈치 많이 봄. 이전 교회에서 부르면 가야하는데 가면 못나옴.

영화에서. 사랑 고백 시 마치 섹스피어 대사처럼.. 당시 관습..교육 받고, 막안살았다는 증거. 이게 중요한가 생각. 언어를 어이 표현하는가? 는 각성. 프랑스사람 철학에 대한 자부심 강함. 전쟁 이후 샤르트르.. 등등 프랑스인 많음.

철학자의 스타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 계몽주의 시대.

자부심의 형태가 ‘공화국’으로 모아짐.

실수해서 남어지는 그림 느낌이 ......

낭만주의는 많이 오해되어 옴

이성. 계몽 순기능에 대한 반발로

비장 겸손 의연 영웅적

현실 행복 낙관 즐길 줄 알고 여성 많이 등장

 

피에트로 롱기 . <Nobleman Kissing a Lady's Hand 1746>

베니스는 운하옆 건물들 다 미술관...

베니스가면 미술관과 교회 두가지만. 봐라.. 아주 볼 것 많다.

카사노바 분위기. 귀족사회. 굉장히 부자 도시

이태리는 제노바 위로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베니스

제노바와 베니스 두 도시가 최고 도시.

십자군 때문에. 제노바 베니스는 반드시 들려 갔음. 부축적

매너 격식 들이 발달. 여성스럽고 엘레강스하게..이게 중요.

계몽주의 신여성 매우 중요.

세상이 바꼇지만 바뀐 첨단에 잇을 때 사람들이 다 좋아 하것나? 카사노바는 계몽주의자. 그걸 다 표현함.. 다른 사람 여전히 감추는데.. 감추는 것 싫어함.

말 얼마나 잘햇으면 16세 때 고위직 성직자가 스카우트. 교회가서 배우가 렉처하니

키 크고 금발 잘생기고 말잘하니..10대 청년이. 이탈리어 라틴어로. 소문남. 계몽주의 덕분. 과거 억압 분위기지만 ..

 

바로크

17 세기 절대왕정

30년전쟁

베르사이유

장대. 기괴 남성적.

이탈리아

로코코

18세기 계몽주의

혁명전야

파리의 살롱

단소. 우아 여성적

프랑스 , 르네상스 다시 재현하는 것.

 

 

살롱 ㅡ 응접실. 큰방임. 개방해서 철학자 예술가가 들어와 토론.

혁명일어나 샬롱 제공자들이 낭패 봄.

18시 계몽 로코코시대 견줄만한 작품 큐브릭만 한게 없다

아마데우스도 잘만들엇지만 수준 다르다.

<배리 린든>

결투 성립 장작 패는건 목 치고 싶은 심정. 결투 관섭의 리얼리티 전체 화면

로코코에 있는 이유는 내일부터 할 낭만주의에 가기 위해

상당히 자유롭고 경쾌하죠 저 사람만...

시티즌은 혁명 이후 나옴.. 아직은 다 신민..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갈등 생김..

단 한명의 스타는 볼테르죠. 광범위한 교양.. 독자들이 모임

 

이성의 시대

볼테르의 교양인 볼테르의 독자들

일체의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반교회 적인 태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

..ㅡ 억압에 대한 해방으로서의 예술. 판서임...

 

 

 

쾌락의 표현

탈레랑 페리고르

1789년 이전에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달콤한 맛을 알지 못한다

혁명전야 곧 규율이전의 자유에 대한 향수

환락의 대상으로서의 에로스 찬가

 

 

여성만 들어가는 큰 방인 것. 중국 유행.. 일본은 다음 세대. 은밀한 여성 모습 보여줘도 괜찮은 시대.. 부셰는 왕의 전속 화가

폼파드로 왕과 친한 뒤 동상.. 옷 표정 마음껏 항유.. 뒤 동상 많이 나옴. 엘레강스하게 이쁜게 찬양

한편으론

연애 여성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

"La toilette" (1742)

 

샤르뎅의 부엌 그림 : 하층민 그림.. 일상을 다룸샤 Kitchen Maid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1697년~1763

문학사에서 연애소설이 처음

피에드 드 마리보의 <사랑과 우연의 유희>1730

* 마디보다주 : 마리보 처럼 쓴다는 것이 유행

재치 잇고 경쾌하고 우아하고 종종 지나치게 장식적인 표현법

이 표현법은 미덕으로 생각했음.. 지식 등의 표현..

이 시절 열린 계급의 표현..이전은 연애소설로 취급.. 이것이 순문학 대상으로 온 것이 로코코 시대. 사랑이 세속적인 것이 됨..

단 사랑하는 순수한 그 마음을 찬양. 마음 자체는 본질은 같다. pure...로코코 일반 세속적 사랑도 확대됨.

마농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국 따라가 사랑 땜에 죽음.

베르테르는 자의식 큼. 고결한 마음 상처 받을 순 없다. 깨끗한 마음 상처 받기 싫어 죽는 것.

전형적 낭만주의

이러다가 89년 혁명 일어남. 혁명봐야 내일 편안해 진다.

신고전주의

다비드가 왜 이런 그림을?

간접적으로 자기 주장 내세움. 혁명 지지 공화주의자. 혁명 이후 화단 주도한 주도자임. 조국 프랑스 위해 청년들아! 라는 의미일 듯. 과거 역사 끄집어 내어 선동하는 것. 이탈리? 프랑스 화단으로 가게 되고 프랑스에서 그림 그리게 됨

신고전주의의 기억

 

그림 1784 다비드 . <The Oath of the Horatii> 1784

혁명 났을 때 저런 그림을 신고전주의라 표현..

간결. 당대 상층계급

다시 그리스 로마시대로 돌아옴.

호라티우 집안 아들들 전쟁 일어나, 칼을 바치면서 공화국 로마 위해 목숨 바칠 결의.. 아내들 슬퍼함...

에릭로메르 <영국 여인과 공작> 2001

 

에릭로메르 <영국 여인과 공작> 2001 프랑스 혁명이 배경.

루이16세 목자른 것 엄청난 충격

이성이란 가치가 존중 받으며 계몽주의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혁명.. 공화정 만들어짐. 쓰러지고 다시 세우고 또 스러지고

자기 가치 전파할 때 사정없다. 안그러면 결국 무너짐.

혁명자는 다 계몽주의자.. 이성. 실제 정치에서 실천함. 아름다운 이성이 저렇게 될수 있겠구나....

계몽주의는 평가... 그 이후 나폴레옹... 이런 체제가 만들어졋을 때 교회 ㅡ 왕조ㅡㅡ 무너지는 과정에서 이성의 폭력이 나옴

이성이 룰이 강해 ‘하지마’를 강조..

19c 유럽을 잡아냄. 음악도. 미술에서 .. 이래러 저래라 나타남...

이런 과정에서 신고전주의

 

<그네>1757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로코코 정원 엄청 발달.. 정원에는 에로스 상징의 큐피터 동상.. 이상화시킨 나무들. 꿈같은 공간.. 애인과 .. 혁명 얼마 전 그림

이 그림들이 찬양하는데 갑자기 다비드가 나타남....

건물 기둥 다시 로마 시대로.. 모잘트 남자가 아니라 헤라클레스 같은 남자가 나옴...

우린 1948년 공화국 그래서 신생국이라 씀. 반만년 역사라는 말 함부로 못함. 기원전 3천년.. 그리스 정도.. 처음 신생국가라는 말 수용 못해 화가 낫음. 걔들 개념으로 신생.. 왕조가 끝낫으니... 프랑스는 1789년 부터 치고 유럽은 100년 이상..

공화국 건설 열망 다양. 다비드..

프랑스만 혁명.. 영. 러. 스. 이. 독

 

다비드 미술계의 나폴레옹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1930년 7월 혁명까지 가장 중요한 유파가 됨

. 이는 전유럽적인 국제적 양상이 됫다

. 나폴레옹 전유럽 점령하듯이 다비드는 미술계. 그림 다비드 1789

팔러먼트 말하는 것을 이양한 것..영국 비하면 다 후진국

 

 

불에서 감히 대중들이 모여 봉기. 권리 달라 주장. 왕권 무너뜨리고 리퍼브릭 선포.. 몇년 후 루이 16세 처형. 쇼크. 혁명도 쇼큰데 왕 죽이니. 감히 국민이. 대륙 한복판의 나라에서.. 지배계급이 보면 끔찍함. 손본다.

전쟁들이 많이 일어남.

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기 일보직전. 위기

나폴레옹이 나타남. 이탈리아계 계몽주의자가.

스페인 치고 이탈리아

구호는 '구악들의 압제에서 해방하기 위해 내가 왔다. '

지독한 보수 왕권 스페인.. 민중 해방 10프로가 90프로 장악

보통사람에게 쉽지 않는 문제가 걸림. 딜렘마. 온 나라마다 다 걸림. 하층계급들은 환영한다.

나폴레옹 미워하지도 사랑하기도 어려움.

부루투스가 공화주의 지키려 시저 죽임.. 아들들은 생각이 달랐음.. 재판에서 다 사형당함. . 가치를 위해 부루투스는 자식을 해석했다...

<부르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 (1789)>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라부아지에 부부상), 1788>

공부하고 닦아서 일어선 과학자들

공화극의 새로운 시민상. 로코코 옷과는 달라짐. 단순하게 변함.

<부르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 (1789)>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라부아지에 부부상), 1788>

 

나폴레옹이 예술을 이용함.

 

혁명과 신고전주의

혁명의 프랑스 예술을 혁명의 쟁취를 돕는 목적으로 이용.

예술을 위한 예술은 무시

. 예술은 정치적 신조가 됐고 예술은 사회적 토대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예술을 보호 육성하는 것이 중요한 통치 수단이 됏다.

러시아 레닌도 이것을 이용. 마음껏 일하게 함.

 

 

다비드 나폴레옹의 전속화가가 됨. 다비드는 좋아서 함. 나폴레옹의 생각 전달에 큰 역할함.

그림이 일종의 미디어 이. 그럼에도 미술가의 혼이 있엇기에 그림사에 있음.. 이데올로기 빠져도 그림 법은 계승

 

<마라의 죽음 1793> The Death of Marat

 

<The death of Bara 1794>

 

<마라의 죽음 1793 The Death of Marat>

피부병 있어서 목욕탕에서 일함. 청원문 읽는 사이 칼로 찌르는 장면. 피부병 고통에도 일하고 잇햇다는 .. 청원 서명시 칼에 조국 위해 희생...

**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그가 혁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있어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1793년 11월 14일 공회에 소개했다. 코르델리에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마라는 대의원들에 의해 예수에 비견될 정도로 숭배를 받았다. 다비드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목욕탕에서의 죽음은 이후 판화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고 공포영화에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가 그린 <르 펠레티에>와 <마라의 죽음>은 공화당의 제단화가 되었다. 두 작품은 파리 시민에게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두 작품은 1795년 2월 9일까지 대회장 회장석 양편에 걸렸고 그해 10월 27일 다비드의 소유로 허락되었다.

<The death of Bara 1794> 전쟁에 젊은 청년의 희생 강조..

낭만주의자는 이렇게 생각 안하기 시작 통념과 일반적 가치를 해부하기 시작..

통념이란게 권력자들이 퍼뜨리는 것.. 일반인은 그냥 넘어가지만.. 정치적 무관심. 여기에 불행이 싹 터지만.. 반대 생각이 나오기 시작..

다시 다비드

구성을 얼마나 잘하는지 압도적이지만 99프로 구라다..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Saint Bernard, 1800-01

 

다비드 -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Napoleon in his Study, 1812>

 

펙터보다 구라가 더 호소력 있음..

알프스 넘는 말.. 불가능한 것.. 선도 분명. .

왜 그렸냐?

한니발만 넘음.. 이 사람은 한니발 같은 사람이다.. 라 강조..신화적 존재로 만들어냄.

딱 보면 이태리 사람.. 왜? 그렸냐.

‘공부하는 사람이다’는 의미. 그냥 혈통으로 태어난 것 아니다. 공부한다 과거 지도자와는 다르다.

실제 그러기는 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고 했다.

로코코 옷과 여성 분장 비교해 보라. 그리스 처럼 바뀜.. 의자 등디자인도 간단.. 시대상황 잘나옴..

 

다비드 -Portrait of Madame Récamier

(레카미어 부인의 초상), 1800

 

프랑소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marquise Pompadour(1759)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부인(1721~1764)

 

 

한창호

이탈리 있으면서 시대극 만들면 그 나라 문화 배우기 위해 봤는데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예수. 그다음 드라마 주인공이 나폴레옹.

1998년 쯤.. 드라마. 밀라노에 나폴레옹 들어오니 농민들이 나폴레옹 만세...

나폴레옹은 매우 복합적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자부심 가짐 프랑스 사람은...

이데올로기 실현 나중 배반하지만 주도햇고 강력 프랑스 만들고. 죄 많이 짓지도 않고..

내일 이성에 대해 의심하는. 현실이 우월한 가치라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는..

공무원 질문..

최후의 만찬 ..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질문 하지 마라 전쟁 난다...

팩트라는 것이 의심 받으면 가치 없이 보인다. 1+2 만 받아드림..

그러면 인터스텔라 같은 것 어찌 볼까?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출생 1748. 8. 30, 프랑스 파리

사망 1825. 12. 29, 벨기에 브뤼셀

국적 프랑스

요약 18세기말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 인물이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같은 고전적 주제를 다룬 대작으로 널리 명성을 얻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잠시 혁명정부의 미술 집정관으로 일하면서 고전주의적이라기보다 사실주의적인 양식으로 〈마라의 죽음〉을 비롯해 혁명 지도자들과 희생자들을 그렸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전속화가가 되었다.

다비드는 젊은 시절부터 천부적 재능을 보였고, 그의 많은 작품들은 로마 공화국의 특성인 엄격하고 애국적인 도덕심으로 되돌아가자는 선언으로 여겨졌다.

18세기말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 인물이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와 같은 고전적 주제를 다룬 대작으로 널리 명성을 얻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잠시 혁명정부의 미술 집정관으로 일하면서 고전주의적이라기보다 사실주의적인 양식으로 〈마라의 죽음〉(1793)을 비롯해 혁명 지도자들과 희생자들을 그렸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전속화가가 되었다. 주로 역사적 사건을 그렸지만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1800년)을 보아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형성기

다비드는 화산재 속에 묻혀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늄의 유적이 새로 발굴되어 예술양식의 복고풍을 부추기기 시작한 해에 태어났다(오랫동안 추정되어왔듯이 그 발굴이 복고의 주요원인은 아니었음). 규모는 작았지만 유망한 직물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757년에 결투를 하다가 죽었고 다비드는 그뒤 2명의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그리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그림을 배운 뒤 역사화가인 조제프 마리 비앵의 화실에 들어갔다. 비앵은 18세기초에 유행했던 경쾌한 정취와 에로티시즘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차츰 성장하는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기울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을 보이던 다비드는 18세 때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공식 미전에서 4번이나 떨어지고 자살(음식을 거부하는 금욕적인 방법으로)까지 시도하는 등 실의에 빠져 수년을 보낸 뒤 1774년 마침내 정부가 이탈리아 체재 경비를 제공할 뿐 아니라 프랑스 안에서도 화가로서의 지위가 보장되는 정부 장학금인 로마 대상을 받았다.

수상작인 〈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는 당시 그의 가족의 친구였던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매력적인 로코코 양식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두운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17세기의 볼로냐 유파, 차분하고 고전주의적인 니콜라 푸생, 극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카라바조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다비드는 이 3가지 양식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카라바조 추종자들의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표현양식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날 때 "고대예술은 활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얼마 동안은 그 예언대로 따라가는 것 같았으나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그스와 예술사가 요한 요아힘 빈켈만 등이 로마에서 발전시킨 신고전주의 이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복고양식을 열렬히 지지하는 젊은 프랑스 조각가 카트르메르 드 캥시와 함께 헤르쿨라늄의 유적과 파이스툼의 도리아식 신전 및 나폴리에 소장되어 있는 폼페이 유물을 보러갔는데 고대 꽃병과 둥근 기둥 앞에서 그는 "방금 백내장 수술을 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명성을 얻음

1780년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자비를 기원하는 벨리사리우스 Bélisaire demandant l'aumône〉를 완성하여 전시했는데, 이 작품에서 고대에 대한 우아하고 감상적인 접근과 푸생을 연상시키는 생생한 기법을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782년 그는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활발한 마르그리트 페쿨과 결혼했다. 페쿨의 아버지는 부유한 건축 청부업자이자 루브르의 건축 총감독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페쿨과 결혼한 날부터 다비드는 성공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1784년 뛰어난 기량으로 비애감을 표현한 〈헥토르를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로 왕립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아내와 화실 조수들을 데리고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 그림은 원래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의 파리 공연에서 처음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완성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희곡에 나오는 어떤 사건과도 상관이 없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3형제가 알바와의 전쟁에서 로마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아버지에게 맹세하는 엄숙한 순간으로서 작품 전체에 극기심과 확고한 용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뚜렷한 윤곽, 꾸밈없는 네모난 공간, 차분한 색조, 프리즈식 구도, 선명한 조명 등의 회화적 처리 방법은 그 주제와 더불어 꾸밈이 없는 비(非)로코코 양식이다.

이 작품은 로마에 있는 다비드의 화실에서 처음 전시되었는데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뒤 1785년에 공식 파리 살롱전에 출품되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랫동안 우아한 곡선과 상류층 부인의 거실 같은 주제에 탐닉해 있던 유럽의 중독증세를 치료해줄 예술적 부활의 선언으로 간주되었다(신고전주의라는 용어는 당시에 사용되지 않음). 원래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퇴폐적인 귀족계급의 타락을 끝장내고 로마 공화국의 특성인 엄격하고 애국적인 도덕심으로 되돌아가자는 선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문화적 영웅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787년 그는 도덕의식을 높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8년에는 그보다는 덜 도덕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 흥미로운 〈파리스와 헬레네〉, 그리고 1789년에는 자기희생의 교훈을 주제로 한 〈브루투스에게 그의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 Les Licteurs rapportent à Brutus les corps de ses fils〉을 그려 더욱 명성을 높였다. 반역자인 아들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로마의 애국적 집정관을 그린 이 그림은 공개되었을 무렵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뜻밖에도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그림은 또한 로마의 일상생활을 정확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또 하나의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 덕분에 다비드는 프랑스 패션에 오랫동안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었다. 최신식 가정에서는 그가 그린 로마 시대 가구와 똑같은 것들을 갖추어놓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잘랐고 여자들은 브루투스의 딸들이 입었던 드레스와 그 시대의 머리 모양을 흉내냈다.

나중에는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는 얇은 사비니 드레스마저 모방하게 되었다.

혁명 초기에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적 자코뱅파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정력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1793년까지 그는 예술위원회 위원으로서 사실상 프랑스 예술의 독재자였고 그때문에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국민공회에서 다음과 같은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설교를 했다. "예술가는 철학자여야 한다. 노련한 조각가 소크라테스, 훌륭한 음악가 장 자크 루소, 숭고한 철학적 교훈을 화폭에 옮긴 불멸의 화가 푸생이야말로 천재적 예술가에겐 이성의 횃불만이 안내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충분한 증거이다."

아마 이성의 횃불이 안내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로마 대상을 받지 못해 수없이 좌절했던 그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는 왕립 아카데미를 폐지했을 뿐 아니라 예술가를 양성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구체제를 대부분 폐지시켰다.

왕립 아카데미는 예술 코뮌(Commune des Arts)이라는 기구로 잠시 바뀌었다가 민중공화국예술협회(Popular and Republican Society of the Arts)라는 단체로 다시 바뀌었으며 다비드가 실각한 뒤인 1795년에는 최종적으로 프랑스 학술원(Institut de France)과 국립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를 결합한 단체로 바뀌어 19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 예술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도자인 다비드는 예술가로서 혁명의 선전물을 제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기념 메달을 만들었고 각 지방에 오벨리스크를 세웠으며 국민 축제와 정부가 주최하는 희생자들의 장엄한 장례식을 기획했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리려 했던 그림 가운데 일부는 영원히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 그중 하나인 〈조제프 바라 Joseph Bara〉는 왕당파의 총에 맞아 죽은 북치는 소년에게 바친 그림이었고, 밑그림만 그린 〈테니스 코트의 서약 Oath of the Tennis Court〉(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와 트리아농 국립박물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 소장)은 1789년 삼부회의 제3신분회(평민)가 새로운 헌법을 채택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맹세한 순간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살해당한 국민공회 의원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르펠르티에 드 생 파르고의 죽음 Death of Lepeletier de SaintFargeau〉은 다비드 스스로 자신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지만 파괴되고 말았다. 그결과 자코뱅당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마라의 죽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혁명 지도자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한 직후인 1793년에 그린 것이다. '혁명의 피에타'라고도 불린 이 작품은 다비드의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순수한 감정의 힘에 의해 신고전주의가 어떻게 비극적인 사실주의로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꼽힌다.

후기

1794년 친구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로 보내진 뒤 다비드는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자신을 아주 서투르게 변호했고 앞으로는 "인간이 아니라 원칙"에 따를 작정이라고 우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1794년에 4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이듬해에도 체포되어 2개월 동안 갇혀 있었지만 두 번 다 그리 불편하지 않은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감옥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2년 전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그와 이혼한 아내가 고난을 겪고 있는 그의 곁으로 돌아와 영원히 재결합한 사실도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첫번째로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유일한 풍경화 〈뤽상부르 공원의 풍경 Vue du jardin du Luxembourg à Paris〉을 그렸고 파리의 다른 건물에 잠시 구금되어 있을 때는 〈자화상〉을 그렸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46세인 자신을 낭만적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갈색 눈동자, 당혹스러우면서도 공격적인 표정을 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그는 어른이 된 뒤 뺨에 종양이 생겨서 줄곧 고통을 받았고 그때문에 말을 잘하지 못했고 얼굴 모습도 약간 비뚤어졌다고 한다.

그는 갇혀 있는 동안에도 루브르에 있는 3개의 화실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1795년 사면을 받은 뒤에는 혁명적 정치에 헌신할 때만큼 정력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린 뒤부터 워털루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의 기간은 결국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젊은 화가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바쳤다.

이들 중에는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 앙투안 장 그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같은 미래의 거장들도 있었다. 그는 그림의 기본은 윤곽이라는 것을 전제로 가르쳤기 때문에 19세기 유럽의 전통적 그림이 데생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비드 자신은 그의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색채의 효과에 반드시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근대 모든 유파의 아버지'라고 하는 외젠 들라크루아 못지않은 색채화가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신고전주의는 초상화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모델들은 대체로 고대조각과 같은 보편성이 부족했고 나체로 포즈를 취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비드는 화가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의 초상화는 심리적 개성과 튼튼한 신체가 특징이다. 1782~83년에 그의 모델이 된 사람은 파리 의과대학 교수인 알퐁스 르루아였고 1784년에는 장모인 페쿨 부인, 1788년에는 화학자인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부부였다. 1795년 석방되자 그는 아름답고 우아한 처제 세리지아 부인과 그녀의 멋쟁이 남편을 그렸다.

1799년에는 유명한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me Récamier〉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당대 제일의 미녀로 파리 사교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모델 레카미에 부인이 약속시간을 자주 어겼기 때문에 이 그림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단순히 그림선생과 초상화가로 일생을 마칠 사람이 아니었다.

 

1799년 새로운 대작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Les Sabines〉로 다시 화려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그림은 흔히 '사비니인들의 약탈'로 잘못 해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설적인 유괴가 일어난 지 몇 년 뒤, 이제 로마인들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비니 여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구출하러 온 사비니 남자들과 로마 남편들 사이의 전쟁을 말리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혼란의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사비니 여인 헤르실리아가 서서 한 손은 로마의 로물루스에게 다른 손은 턱수염을 기른 사비니의 타티우스에게 대고 호소하고 있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세련되지 못한 로마 양식에서 벗어나 좀더 우아한 그리스 양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린 의도라고 말했고 이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의 우아함은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는 또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던 10년 세월이 지난 뒤 프랑스인들의 화해를 호소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아마 벌거벗은 고대 전사들일 것이다. 그는 이제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상퀼로트(sans-culottes:'반바지를 입지 않은'의 뜻으로 급진적 공화주의자를 나타냄)의 라파엘로'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나폴레옹 1세 Jacques Louis David가 그린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1812)

나폴레옹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칭찬하고 그 그림에 나타나 있는 다비드의 재능을 이용하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다비드는 정치적 공직을 맡지 않은 채 2번째로 정부의 공식 화가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통령 정부에서, 1804년부터는 제국의 공식 화가로 일했다. 좌익인 자코뱅주의자에서 우익인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변신한 저명인사는 다비드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항상 역사적 영웅을 숭배했던 것이 분명하다. 나폴레옹 시대에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05~07년에 그린 대작 〈대관식〉이다.

이따금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 작품에는 신고전주의 대신 옛 프랑스 왕국의 공식 초상화 기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분위기(노골적으로 모방한 경우도 많음)를 혼합한 양식이 나타나 있다. 뒤이어 1810년에는 〈독수리를 날려보내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작을 완성했고 1812년에 그린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음에도 인물의 성격을 날카롭게 포착한 초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다.

평생 큰 사건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살아 온 그는, 그런 것들과 완전히 단절되자 옛날의 넘치던 활력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말년에 그는 〈겐트의 세 여인 Les Trois Dames dites de Gand〉이라는 뛰어난 초상화를 완성했는데 아마 벨기에에서 제자로 삼은 프랑수아 조제프 나베즈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Les Trois dames de Gand (en réalité de Vichte). Portraits d'Isabelle Rose van Tieghem, femme reproduction procédé giclée

 

마리보다주

http://cafe.daum.net/Fdrama/ISF0/107?q=%B8%B6%B8%AE%BA%B8%B4%D9%C1%D6&re=1

연애시림의 묘사에 있어 우아하고 세련되며 지나치게 기교적인, 그러나 아주 새로운 언어를 구사했다. 이러한 마리보의 독특한 문체를 일컬어 마리보다주 marivaudage라고 한다.

마리보다주- 독창적인 언어유희를 통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 그의 흐극은 삐꺽거리는 희극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국민들의 빈곤한 삶이나 이에 대한 왕과 귀족들의 무관심, 어린이, 여자, 노임들의 고통, 물질 숭배 같은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비판의식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Le Jeu de l’amour et du hasard)』(1730)과 같은 연애 희극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희극들에서 미묘한 연애 심리의 발전을 섬세하게 그림으로써 비극에서의 라신과 자주 비교되며, 그 심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 우아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마리보다주(marivaudage: 섬세하게 멋을 부린 말이나 문체)’라는 용어를 낳기도 하였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1730)》 《거짓고백(1737)》 《시련(1740)》 등 연애심리극으로 유명하다. 남녀간의 사랑과 그것을 둘러싼 주인공의 심리가 경쾌하지만 마음의 주름을 교묘히 표현하는 마리보다주(marivaudage)라고 하는 대사에 특징이 있었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 Le Jeu de l'amour et du hasard〉(1730)은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희극으로 낭만적인 정경, 미묘한 차이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섬세한 감정의 음영, 능란하고 재치있게 주고받는 말솜씨 등 그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언어구사는 오늘날까지도 '마리보풍(風) 말투'(marivaudage)로 통하며, 그당시의 감수성과 세련을 반영하고 있다.

마리보 연극의 특성은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묘하고, 기교적이고, 하려한 시정은 셰익스피어보다 더 섬세하다는 평을 듣는다. 연극 무대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반영하고 있으며, 등장 인물들은 우아함과 섬세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방시으로 마리보는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고 진실한 감정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마리보는 마음속의 고뇌와 은밀한 기쁘의 근원으로서 감미로운 사랑의 감정을 즐겨 다루었다. 그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인간의 모든 숨겨진 정서들을 그려내고, 사랑의 일시적인 상태와 속도, 사랑의 진행 단계 등 그 뉘앙스들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마리보는 앞선 시대의 희극적 전통에서 해방되어 연애 심리의 세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희극 장르를 창조했다. "나는 남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좋든 싫든 내 방식대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있었다

배리 린든 (1975) Barry Lyndon

요약정보 드라마 | 영국 | 183 분 | 12세이상관람가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라이언 오닐 (배리 린든 역), 마리사 베렌슨 (호노리아 린든 역), 패트릭 매기 (발리바리 역), 하디 크루거 (포츠도르프 역)

줄거리 18세기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 친척인 노라 브래디를 사랑하고 있던 청년 레드먼드 배리는 그녀가 영국 장교 존 퀸과 약혼하자 그에게 권총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에서 이긴 배리는 그대로 더블린으로 달아나지만, 도중에 강도를 당하고 만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그는 영국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이영화의 키워드 : 소설원작, 사랑

영국 여인과 공작 (2001) L'Anglaise Et Le Duc The Lady And The Duke

요약정보 드라마, 시대극 | 프랑스 | 129 분 | 15세이상관람가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장 클로드 드레이퍼스 (오를레앙 공작 역), 루시 러셀 (그레이스 엘리엇 역), 알랭 리볼트 (비롱 공작 역), 샬롯 베리 (플루셰리 역)

줄거리 그레이스는 루이 16세와 사촌지간인 오를레앙 공작과의 연애를 청산하고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한다. 하지만 혁명이 닥치면서 오를레앙 공작에 대한 믿음과 신의를 지키려다가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제작노트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공로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영국 귀부인 그레이스 조지 엘리엇의 회고록 <프랑스 혁명중 나의 일기>를 영화화한 작품. 에릭 로메로 감독의 세번째 역사극이다. 공개 당시 그림을 화면에 옮겨놓은 듯한 이미지로 화제가 되었던 디지털 영화이기도 하다.

에릭 로메르 감독이 80세의 나이에 연출한 작품이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회화 작품과 그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http://cafe.daum.net/mondaysunday/A6rh/3257?q=%C0%DA%C5%A9%20%B7%E7%C0%CC%20%B4%D9%BA%F1%B5%E5%C0%C7%20%B0%F8%C8%AD%B1%B9%C0%BB%20%C0%A7%C7%D1%20%C1%A6%B4%DC%C8%AD%20%3C%B8%B6%B6%F3%C0%C7%20%C1%D7%C0%BD%3E&re=1

자크 루이 다비드의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정치에 대한 다비드의 관심이 급증했다. 그는 1794년 1~2월 한 달 동안 공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쟈코뱅 클럽 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안보위원회Committee of General Security와 교육위원회Committee of Public Instruction 멤버로 활동했다. 1794년의 쟈코뱅 클럽은 그 수가 6천 8백 개가 넘었고 멤버는 50만에 이르렀다. 1791년 파리를 방문한 영국인의 말에 의하면 거리마다 쟈코뱅 클럽이 있었다. 다비드는 지나칠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안보위원회는 매일 매일의 테러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매우 과격한 단체로 이런 공포정치에 다비드가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이 시기에 다비드는 혁명의 세 순교자들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 르 펠레티에가 과거 왕의 호위대였던 파리스에 의해 저녁식사 도중에 살해되었다. 귀족 르 펠레티에는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이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죽음을 자유를 위한 순교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벤돔 광장에 놓인 시신의 머리에는 월계수관이 씌워졌으며 몸통을 천으로 덮지 않아 그가 어느 부위에 상처를 입고 살해되었는지 볼 수 있게 했다. 르 펠레티에의 찢겨지고 피 묻은 옷과 파리스가 사용한 칼도 함께 전시되었다.

 

 

 

115

 

 

 

9

다비드는 대리석을 사용해 기념비를 제작하려다 그림으로 그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1793년 8월 10일에 개막된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르 펠레티에의 시신이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대 전사의 모습처럼 보였다.115 그의 모습은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9에서의 헥토르의 시신과 닮았다. 공화당 대의원의 성스러운 죽음이 왕을 처형한 데 대한 시민들의 죄의식을 다소나마 덜어주었다. 살해에 사용된 파리스의 칼은 르 펠레티에의 상처 부위 위로 한 가닥 실에 매달린 것으로 구성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칼이 왕의 경호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칼은 종이를 뚫고 있는데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전제군주의 죽음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비드는 그림 하단 오른쪽에 “르 펠레티에에게 다비드가 1793년 1월 20일”이라고 적었다.

다비드는 1793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에서 르 펠레티에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막 숨을 거두는 장면을 그리려 했다고 적었다. 르 펠레티에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데 만족한다. 이것이 적들에게 교훈이 되길 바란다.

 

 

117

 

116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르 펠레티에의 딸 수잔이 훗날 다비드의 후손으로부터 1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주고 이 작품을 구입한 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열렬한 군주제 지지자였다. 또한 타르디우가 다비드의 작품을 잉그레이빙한 것도 수잔이 오리지널 판화와 복사본을 여러 점 구입해 없애버렸다.116 오늘날 우리는 타르디우의 찢겨진 판화117와 다비드의 제자 드보제의 드로잉117을 통해서 다비드의 원래 작품을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잔이 아버지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다비드의 작품을 불태워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1804년에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을 기념하는 자신의 초상118을 다비드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다비드는 르 펠레티에의 순교 모습을 소개한 지 석 달반 만에 또다른 공화당 대의원의 죽음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가 살해되었다.

마라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시민의 친구’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쟈코뱅 행동대원들에 의해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유혈사태가 종종 발발하고 있었다. 마라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과격한 언행으로 1793년 4월에 구금된 적도 있었다.

마라는 노르망디 태생 스물네 살의 샤로트 코르데이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었다. 카엥에서 온 샤로트는 드라마 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후손으로 보수적 왕당파 집안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주디스(Judith,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에 비견해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수녀단에서 교육을 받고 2년 동안 수녀로 헌신한 적도 있는 그녀는 플루타르크, 루소, 볼테르의 저서를 읽었고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7월 9일 마차를 타고 카엥을 떠나 11일 파리에 도착한 후 15센티미터 길이의 칼을 구입했다. 샤로트는 혁명 4주년 국민공회 기념식에서 마라를 죽일 계획이었지만 병중이었던 마라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샤로트는 마라의 집에 침입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코르델리에 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지만 마라의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아 실패했다.

빈틈 없고 기민한 샤로트는 마라에게 카엥에서 벌어지는 반혁명적인 운동에 관해 적어 보내 환심을 샀다. 그녀는 다시 마라의 아파트를 찾았다. 이번에도 그의 아내가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를 하곤 했다. 그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열여덟 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미리 준비한 칼을 꺼내 들고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마라는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고 몇 분 뒤 아내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샤로트는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는데 한 사내가 그녀를 막고 서서 쇠사슬로 내리쳤다. 얼마 후 경찰이 와서 그녀를 끌고 갔다.

이튿날 공회에서 대의원 귀로는 샤로트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을 가해야 한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샤로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9월의 대학살을 부른 장본인을 복수한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십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그녀는 또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했다.

귀로는 대의원들을 향해 외쳤다.

 

살해 자의 손이 우리에게서 시민을 가장 용기있게 옹호하신 분을 강탈했소.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자유를 위해 늘 자신을 바쳐온 것 밖에는 없소. 우리는 아직도 우리 가운데 그분을 찾고 있소. … 다비드,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요? 당신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르 펠레티에의 순사 모습을 후세에 남기려고 그렸는데 당신이 그려야 할 작품이 여기 하나 더 있소.

 

 

 

121

이에 다비드는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응답했다. 다비드는 마라와 함께 프리메이슨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라가 살해되던 날 밤 현장으로 달려가 그의 손에 펜과 종이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목욕하는 동안에도 마라는 나라를 위해 집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장면을 그대로 그려서 프랑스 시민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마라의 장례장면을 그리려고도 생각했지만 여름이라 시신이 금새 부패해졌으므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마라의 시신이 초록색으로 변했으므로 화장으로 색을 달리 했고 뻣뻣해진 손에 억지로 깃펜을 쥐게 만들고 시신을 조금 위로 세운 후 그렸다. 펜으로 검정색과 브라운색을 혼용해 드로잉한 것은 시신을 직접 보고 그렸기 때문인 듯하다.121

 

 

 

11

마라의 시신은 코르델리에르 정원 나무 아래 안장되었는데 그 나무 아래서 마라는 시민들과 대화하곤 했다. 샤로트는 혁명의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녀는 임종에 신부가 입회하는 종교의식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11을 그렸는데 그가 혁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있어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1793년 11월 14일 공회에 소개했다. 코르델리에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마라는 대의원들에 의해 예수에 비견될 정도로 숭배를 받았다. 다비드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목욕탕에서의 죽음은 이후 판화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고 공포영화에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가 그린 <르 펠레티에>와 <마라의 죽음>은 공화당의 제단화가 되었다. 두 작품은 파리 시민에게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두 작품은 1795년 2월 9일까지 대회장 회장석 양편에 걸렸고 그해 10월 27일 다비드의 소유로 허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