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 점심먹는 날

무거운 빈가방 2012. 3. 25. 10:58

다른 얼레빗 모두 보기

단기 4345(2012). 3. 20.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가 진 후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낮이 좀더 길게 느껴집니다. 춘분 즈음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 음력 2월을 이르는 말로, 바로 춘분을 앞뒤로 한 때를 가리킵니다.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일년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습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지요. 그 흔적으로 “점심(點心)”이란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다과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끼가 고작이었습니다. 보통은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아침저녁 두 끼만 먹고, 2월부터 8월까지는 점심까지 세끼를 먹었지요. 낮 길이가 짧은 탓도 있지만 일하지 않는 겨울엔 두 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춘분이 지나면 농번기가 닥쳐오기 때문에 일꾼들의 배를 주릴 수 없었지요. 일을 시켜도 배불리 먹이고 시켜야 능률이 오를 겁니다.


[국악 속풀이 49]

조선 아악을 들으니 내 몸이 하늘로 오르는 듯한 느낌이---

                               

국악속풀이 <47>에서는 유럽의 유명 신문들에 실린 감정평을 소개하였고 그들이 인상깊게 이야기하는 종묘제례악과 대취타를 간단히 소개하였다. 다시 국악이란 항아리를 들고 여섯 번째의 감정가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중국의 음악인 차이링의 말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듣고 느낀 점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서양음악은 물론, 인도의 불교음악에서 받는 느낌과도 다르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동방 민족을 대표하는 독특한 종교관과 신(神)적 정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음악이 서양음악과는 다르고 인도의 불교음악과도 받는 느낌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동양을 대표하는 독특한 종교관을 내포하고 있어서 신비롭고 그러기에 신적인 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감정가의 논평과 다르지 않다.

이상, 만나본 외국의 저명 음악인들 외에도 한국의 전통음악을 감상하고 느낀 논평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는 내용은 같고 표현만 다를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의 전통음악은 매우 훌륭한 음악미와 차원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세계적인 음악임을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평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백 번 양보해서, 그들의 평가가 단지 우리 예술단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치레나, 혹은 호기심을 충족한 대가로 남발하는 예우였다고 덮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일본인 다나베 히사오(田邊常雄)가 최종적으로 해결해 준다. 음악인 700~800여 명을 확보하고 조선조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장악원(掌樂院)은 대한제국 말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그 규모나 제도가 위축되기 시작한다. 일제의 강압정치가 음악을 관장하던 국가기관, 장악원에도 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1897년까지만 해도 궁정의 악사 수는 770여 명이었다. 그런데 10년 후인 1907년엔 300여 명으로 감축되었고 1911년엔 또다시 18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15년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1917년에는 또 50여 명이 감축되어 이제 남은 인원은 40~50여 명에 불과하였다. 침략자의 만행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이 인멸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은 일본 음악계의 권위자를 한국에 보내어 한국의 전통음악을 더 존속시킬 가치가 있는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지으려 하였다. 이때 침략국의 음악인으로 선정되어 한국에 파견되었던 사람이 바로 다나베였던 것이다. 그는 종묘제례악의 ‘전폐희문’이란 음악을 감상한 후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의 아악을 들으니 나의 몸에 날개가 달려 하늘에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아악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느꼈다. 애석(哀惜)하도다! 어찌하여 우리 일본에는 하나도 전하지 않고 있는가! 고대(古代)의 음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조선뿐이다. 실로, 세계의 보배이다. 나는 이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동양의 자랑스러운 음악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싶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떻게든 선대의 음악을 지키겠다는 악사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나베는 한국음악의 높은 예술성 앞에 예술가적 양심을 속이지 못하고 느낀 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그는 본국 정부에 장악원의 직제개편이나 악사의 처우개선, 악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 등 조선의 음악장려를 위한 다양한 건의를 적극적으로 하였고 그 내용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고 한다.

음악을 대하는 비범한 그의 음악관은 높이 사야 할 일이다.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이처럼 상대를 감동으로 몰아넣을 수 있도록 예술성 높은 전통 음악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점이고 또한 이를 연주해 준 훌륭한 악사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음악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계승해 오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의 얼’이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전통음악인 것이다.

0

            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한국전통음악학회장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서울 종로구 당주동 2-2. 영진빌딩 703호
www.koya.kr, pine9969@hanmail.net
☎ (02) 733-5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