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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친일파 - 기사

무거운 빈가방 2015. 8. 13. 07:24

<암살>을 통해 잠시 볼 수 있는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전해 진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경제를 좌우하고 학계와 문화계에 뿌리를 내렸다.

처단하지 못한 친일들 때문에 역사 부터 시작으로 많은 것은 왜곡되어 왔고

일본이 지금도 저리 기고만장해도 끽 소리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해방이후 <반민족특별법> 법원을 침탈(이승만의 지시)하기도 하고 사회적 페해를 입힌 것이 어마어마하다. 근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자도 친일의 후손이다.

이 땅의 비극 셋으 ㄹ꼽으라 한다면 나는 감히 친일청산을 못한 것을 두고 싶다.

친일 청산을 못한 것, 이것으로 현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왜곡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려진 한국일보 기사를 그냥 그대로 올려본다.

더욱 상세한 것들이 많이 잇지만 눈에 보여 끌어와 올렸다.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친일파 대물림은 진행형

수정: 2015.08.13 04:40
등록: 2015.08.13 04:40
 

재산 환수 리스트 35%가 일왕으로부터 작위 받아

친일 대가로 받은 연금 기반,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재산 늘려

실제 국고 환원 재산은 극히 일부… 친일의 부와 권력 세습 이어져

대한제국 황족 이재완(1855~1922)은 일제의 해결사였다. 그는 1903년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그 공로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낙점됐다. 2년 후엔 조흥은행 전신인 한성은행 행장이 돼 일본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발행한 제일은행권 통용에 앞장섰다.

 

친일의 대가는 두둑했다. 이재완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포상금 33만6,000원(현재기준 약 33억원)을 받았다. 그는 이 돈을 다시 한성은행에 투자해 막대한 이자 수익을 얻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이재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에 대한 공로가 경탄할 만하다. 이씨가 금전에 무한한 욕심이 있는 것을 간파해 이처럼 대성공을 이루게 됐다.”

부는 대물림됐다. 이재완이 숨진 뒤 후작 작위를 이어 받은 아들 이달용은 광산 개발, 생명보험회사 운영 등 아버지 못지 않은 수완을 발휘해 재산을 불렸다. 가족들은 서울 가회동 대저택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후손도 서울 명문대 교수를 지내는 등 사회 주류로 살았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위원은 12일 “선친의 재산이 있었기에 친일파 후손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숫자로 보는 친일파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재산

부와 권력의 공생. 친일파가 오늘날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한국일보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재산환수 리스트에 오른 168명 중 58명(35%)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 귀족’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무려 163명(97%)이나 됐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실장은 “일제가 친일파에게 지급한 부와 권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친일의 역사는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된 당일 일본 정부는 친일파 76명에게 선물을 안겼다. 작위 부여와 함께 토지와 1억~4억원 규모의 은사공채증권(연금)을 지급한 것. 친일파는 이를 기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불렸다.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불리던 민영휘는 민중의 논밭과 화폐를 강제로 빼앗았다. 작위를 받은 후에는 정부로부터 회사 설립과 합병에 대한 인ㆍ허가를 손쉽게 얻어내 부를 불렸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민영휘의 후손들은 체계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가족 회사를 설립했는데 10년이 안 돼 서너 배 성장했다”며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는 경제적 특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친일파 168명이 후손들에게 남긴 재산은 총 1,113만9,645㎡, 2,106억원 규모다. 후작 이해승의 후손이 보유한 땅은 197만㎡(320억원), 남작 이근호 후손의 땅은 6만3,652㎡(154억원)에 이른다. 자작 고영희의 후손은 3대가 친일재산조사위원회 리스트에 오른 사실도 확인됐다. 아들(20만㎡ㆍ42억원), 손자(23만㎡ㆍ39억원), 증손자(1만5,000㎡ㆍ2억6,000만원)가 모두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참여정부 때 친일 대가로 받은 재산을 국고로 환원했지만 추적이 쉬운 토지에 국한됐고 제3자에게 팔아 치운 토지나 현금화한 재산, 귀중품 등은 제외됐다”며 “친일파로부터 회수한 재산은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후손도 부를 기반으로 권력 유지

1910년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제에 넘기고,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해 자작 작위를 받은 민병석의 차남은 민복기 전 대법원장이다. 민 전 대법원장의 자제들도 기업인, 검사 출신 변호사로 활동했다. 민병석은 후손들에게 2만3,340㎡(3억8,000만원)의 토지를 남겼다. 유신정권은 1978년 정년 퇴임하는 민 전 대법원장에게 최고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아버지는 일제, 아들은 독재정권에서 훈장을 받은 셈이다.

1907년 순종을 협박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자작 이병무의 증손자는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대기업 부회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자작 민영휘의 손자는 한국은행 총재, 후작 이해승의 손자는 서울그랜드힐튼호텔 회장, 을사오적인 자작 이근택의 손자는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증조부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의 참의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현준호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현준호의 친일행위를 인정, 소유 땅 3만2,000㎡(10억원)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는 “1~3공화국 시기 정ㆍ부통령을 포함해 414개 요직에 앉은 사람 중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111명이나 된다”며 “광복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부와 권력이 세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애국과 친일.. 후손들 삶의 간극 더 벌어졌다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中) 대물림되는 친일 잔재한국일보 | 박주희 | 입력 2015.08.13. 04:48

경북 영덕을 무대로

항일 의병장 신돌석과 친일 기업인 문명기 인생 갈려

그 후손들 삶도 극명한 대비

일제가 식민지 건설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1878년, 경북 영덕을 무대로 엇갈린 일생을 살게 될 두 남자가 태어났다. 한 사람은 평민출신으로 항일 의병장을 지낸 신돌석(~1908), 또 한 사람은 일제치하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던 문명기(~1968)다. 혼돈의 시대 애국과 매국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두 사람의 운명은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후손은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극명히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다.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64)씨를 만났다. 그는 66㎡(20평) 남짓한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60여년을 살면서 그가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다. 신씨와 아내는 이곳에서 노모(80)를 모시고 있다.

신씨는 "집이 누추하다"면서도 "그래도 이 집에서 부모님과 6남매까지 8명이 살았다"고 말했다.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집 한 채가 내심 고마운 듯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씨는 평범한 마을, 안락한 집에서 살지 못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한 산속에서 태어나 세 살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 장군이 300여명 남짓한 병력으로 울진, 삼척, 강릉 등에서 일본 주둔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영해 경무서(지역경찰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습격하자 일제는 영덕군 축산면에 있던 그의 집과 논ㆍ밭 등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인근에 모여 살던 일가 친척들도 조사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 집과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힌 신 장군의 부인 한재여(1878~1952)는 결국 1920년대 후반 아들 둘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 화전 생활은 광복 이후까지 30여년 간 계속됐다.

광복이 찾아와도 신씨 일가는 고향인 영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 장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친척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신씨는 "결국 청송군 진보면으로 내려와 아버지(신병욱)가 고추, 콩 등을 떼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내와 자식 6남매를 건사했다. 신 장군의 항일운동을 입증하기 위해 5년여 간 동분서주한 끝에 1962년 어렵사리 건국훈장 대통령장도 받았다. 하지만 간신히 생활이 안정돼 갈 무렵 일이 터졌다. 신씨는 "아버지가 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등 기념사업을 준비했는데 추진위원장이 사업비를 몽땅 들고 도망갔다"며 "50년 전 돈으로 7,000여만원의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고 말했다.

신돌석 손자 신재식씨, 빠듯한 살림에 대학 진학 포기 입대

문명기 손자 문태준씨, 재력 바탕으로 엘리트 코스 밟아 교수·장관 등 고위직 두루 섭렵

당시 안동의 중학교에 입학하려던 신씨는 돈 한 푼 없이 전세방을 전전하는 가족들을 보며 결국 진보면에 남아 중ㆍ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갔다. 다행히 제대 후 유공자 혜택을 받아 농협에 취직했고 3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7년 전 정년퇴직 했다. 그는 "그래도 두 아들을 안동에서 공부시켰고, 조부 고향인 축산면에 기념관이 생기고 생가도 복원돼 고마운 일"이라며 웃었다.

신 장군의 후손들이 굴곡진 삶에 허덕일 때 문명기 일가는 승승장구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명기는 유년 시절 영덕으로 이주해 1907년 지품면에 제지공장을 차렸고 금광을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1935년 금광을 처분한 돈 12만원 중 10만원을 일본 육ㆍ해군 비행기 구입비용으로 헌납해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본력을 등에 업고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문명기는 막대한 자본력과 인맥을 활용해 자녀와 손주들을 지원했다. 종손 문태준(87)은 1950년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한 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연세대 교수가 됐다.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정ㆍ관계로 발길을 넓혔다. 4선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세계의사협회 회장,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도 두루 섭렵했다.

항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씨가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자택에서 어머니 김분연씨와 함께 1962년 신 장군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찾은 영덕군 강구면 문명기의 묘 옆에는 노산 이은상의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자리잡았다. 비문에는 "국도 개통과 동해안 축항 공사에 정력 했으며 (중략)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제제(濟濟)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고 쓰여 있었다. 일제치하 문명기의 친일 행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기의 친일전력이 묵인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강구면에서 만난 박모(84)씨는 "군사정권 시절 손자(문태준)가 국회의원이었는데 누가 친일행적을 문제 삼으려 했겠느냐"며 "아직도 문씨 일가를 두려워해 다들 말을 아낀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79ㆍ여)씨는 "문씨 일가로부터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많아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행적을 들추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세기 전 숨진 친일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얘기다.

제지공장이 있던 지품면에도 문명기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후손들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민 요청으로 문명기 장례가 군민장으로 치러졌다는 말도 들렸다. 하지만 대다수 마을 사람들의 기억은 이와 조금 달랐다. 지품면에서 만난 김원형(77) 씨는 "갑진년(1964년)에 마을 유지 4명을 발기인으로 문명기 기념비를 세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당시엔 문씨 일가의 위세가 대단해서 기념비 설립을 거북하게 생각했던 주민들도 대놓고 반대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념비에는 누군가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가 다시 붙여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김씨는 "물론 문명기가 친일 의혹을 받고는 있으나 금광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졌고 그 자손들이 마을발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라고 문씨 일가를 평가했다.

문명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평가가 분분했기 때문인지 일부 후손은 '문명기 미화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문명기가 환갑에 얻은 딸 문모(77)씨는 2000년대 중반 아버지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러 영덕을 방문했다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문씨는 안동사범대를 졸업한 뒤 대구에서 터를 잡고 초등학교 교장, 정부ㆍ여성단체 간부 등 지역의 유력인사로 살아 왔다. 그는 200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금광을 인수하겠다던 일본사람이 계약금을 주지 않아)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금으로 된 명함을 들고 일본 총독을 만나러 갔다" "(비행기 헌납은) 일본인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등 아버지의 과거를 왜곡 포장하는데 앞장섰다. 손자 태준씨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강구면 소재 땅 1만1,207㎡(3,390평)가 2009년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법에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현재 태준씨는 서울 용산구에, 딸 문씨는 대구에 생존해 있다. 태준씨는 현역에서 물러난 뒤 서울 용산구에 있는 228㎡(69평)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중구의 일가 소유 건물을 관리하고 있고, 딸 문씨는 한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태준씨는 건강을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했다. 문씨는 아버지의 애국주의자 면모를 담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인을 통해 전해 왔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영덕ㆍ청송=글ㆍ사진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