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4 함창 카페 버스정류장.
<작년 가을 사진이다. 이 날이 마눌님 탄신일 이었다>
보통은 서울에서 내려 올 때 들린다.
위치가 서울 부산 중간 쯤 되어서 쉬기도 하고
카페지기 박선생의 입담과 즐거운 웃음을 담아 가려고 들린다.
조누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감으로도.
마눌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들려 차한잔 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긴다.
특히 연극을 하고 난 뒤는 박샘이 연극 선배되는 셈이니 더 좋다. 연극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으니..
이번엔 서울 올라가면서 들렸다.
요사이 내려 올 때는 춘천 들렸다 오니 동선이 많이 부담스러워서다.
출발하면서 누님에게 메시지 보내니 오신다 한다.
가는 길이 기대감으로 더 즐겁다.
경북을 넘으니 비가 부슬부슬 나린다.
우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은 오래 볼수록 할 이야기가 더 많은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약간 궁금한 것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잘마른다.
부부는 제일 오래 지냈기에 할 이야기가 더 많은 듯 하다.
왕복으로 치면 차 안에서만 10시간 넘는다.
근데 이야기가 쉽게 끊어지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말이란 우물과 같은 가 보다.
카페에 들어가니 홀로 앉은 손님 남 한명과 여 한명이 있다.
여자분은 뭔가 부지런히 읽고 쓰고, 남자는 연탄불 앞에서 손을 쬐고 있다.
우린 창가 제일 좋은 자리에 앉는다.(멍 때리기 좋은....)
조금 있으니 누님도 바로 왔고, 들어오자 마자 누님은 남자에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 카페는 함창의 문화중심지이다.
누님은 지기에게
“상주 신문 인터뷰 기사 읽었지?”
“못봤는데!”
“내가 직접 붙였는데 그걸 놓쳐!”
그러면서 폰에 정리한 인터뷰 기사 내용을 보여준다.
누님은 <상주의 소리> 편집장이고, 기자이고, 사장이고 그렇다.
자리깔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얼마 전에 “카페버스정류장” 하여 인터뷰 한 모양이다.
박선생은 글을 읽고는
“이렇게 훌륭한 글은 붙여 놔야지, 사실만 적은 것이지만”
너스레를 떨고 주변 몇몇에게 톡을 보내고 전화도 한다.
이리 훌륭한 사람이 주변에 있음을 자랑으로 알라고 기억을 당부하듯 마무리 점을 콕찍는다.
이리 웃음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이다.
함창 '카페 버스정류장'
누가 카페 이름을 물을 때 '버스정류장' 이라고 하면 재차 물을 때가 많다..
카페 이름이 버스정류장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일단 함창 '버스정류장'이라고 네비를 치고 그곳에 가면 버스정류장이라고 쓰인 정류장 표지판과 함께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카페에 들어갈 때도 길거리로 난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 벽면에 걸린 멋진 시들도 감상하면서 건물을 돌아가면 카페가 손님을 맞이한다.
신발을 벗고 친구집을 방문하듯 들어서면 응접실인 듯 방이 있고 짙은 커피향을 품은 주인장 박계해씨를 만나는데 그를 카페 '사장님'으로 부르는 사람보다 '박선생님'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는 교사였다.
경남 양산 개운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부산의 교사연극집단 '조명이 있는 교실'의 창립맴버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살던 전국의 많은 교사들은 헉급운영의 모범으로 그를 기억한다.
개운중학교에서의 학급운영 사례는 올바른 학교교육과 학생에 대한 인식, 학급운영이 학교운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교사들에게 알게 해 주었고 학급운영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국을 누비며 학급운영 교사연수을 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고 사라졌다.
그는 한번도 가본 적 없었던 경북 문경 가은에 터를 잡았다. 귀농을 한 것이다.
운명의 신을 갑자기 나타나 손을 잡아끌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주는데 현실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쉽게 따라가지 않지만 호기심이 많고 미래가 궁금한 사람은 새로운 세계에 기꺼이 발을 딛는다.
그가 그랬다.
그의 남편이 귀농에 관심을 갖고 귀농운동본부에서 교육을 받으려 하는데 혼자 하는 것보다 두사람이 같이 하면 교육비를 조금 깎아준다하여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도 남편과 같이 귀농교육을 받았다. 귀농교육을 받으면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농'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과.자연 속에서의 삶에 대한 가치를 새기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삶을 거부하고 농촌에서 자급자족과 자연친화적 삶을 추구하고 살았던 스콧 니어링이 그의 삶의 모범이었다.
2002년 3월에 귀농학교 등록하여 6월에 수료하고 7월에 학교를 그만 두고 바로 귀농을 한 우리나라 최단 기록의 귀농사례였다 한다.
가은에서 10년 귀농생활은 벼농사 중심으로 하였는데 3년 만에 퇴직금은 다 털고 생활은 힘들었으나 그녀를 힘들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가은에서 그는 노인대학, 지역공부방, 봉사활동, 별자리학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러다 2011년 함창으로 왔다.
지금의 카페버스정류장 건물은 오랜 역사를 가진 철공소 건물이었다.
철공소를 그만 두고 오랜 시간 비었던 건물인데 이 건물을 보는 순간 바로 여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허술하고 낡았고 쓸모 없어 보이는 공간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보물창고처럼 보였고 공간의 살림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청소에서부터 내부장식까지 그녀는 돈 들이지 않고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그가 좋아하는 시와 책과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내용들로 벽 면이 채워지고 그 속에서 그도, 찾아오는 사람들도 편안하고 몸과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카페가 쉬는 화요일 저녁에는 노래, 시낭송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이 있고 카페 2층 공간은 전시장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 그의 카페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시인들이 카페 버스정류장을 노래하였다.
어떤 시인은 글이 잘 되지 않으면 보은에서 버스를 타고 함창에 내려 카페에서 글을 쓰고 간다.
예전의 그가 학급운영으로 전국을 누빈 교사로서의 삶을 누렸다면 지금의 그는 아름다운 문화공간 운영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런 자신의 삶을 그는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가은에서의 귀농생활은 <빈 집에 깃들다>로, 또 하나는 <카페, 버스정류장 >이다.
작년에는 코로나 19로 전국이 얼어붙은 만큼 그도 카페 문을 닫은 적도 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그에 맞는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간다. 스스로 각본을 쓴 일인 연극도 해보고 지역신문에 중편소설을 연재하기도 한다.
올 해는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공간의 어느 부분이라도 누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공간을 빌려 줄 생각이란다. 숙박공간에서부터 전시, 문화활동 등 자신이 기획하지 않고 누구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카페 공간을 내 줄 생각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신감.
그의 이 느긋하고 편안함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고 가꾸어나가는 마음이 있어 그럴 것이다. 그런 마음은 어쩌면 그가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그의 고향 ㅡ 경남 하동 악양, 섬진강 넓은 물길의 마음 아닐까.
지금 여기가 최선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하며 카페 버스정류장은 멈추는 곳이기도 하고 힘차게 한 발 내딛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누님은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있다. 얼굴이 약간 부석하다.
모른 척 한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다가 항암치료 하고 dlT음을 말한다.
3주마다 3번을 했고 곧 4번째란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아프다.
직일 놈들은 건강하여 펄펄 나는데 주변 정의로움은 건강을 잃어 힘들어 한다.
그런데 누가 누님을 환자라 하겠노.
자신이 아프다하면 들은 사람이 더 아파하는 것 같아 위로해 줘야 해서 그게 싫어 이야기 잘안한단다.
누님답다.
한 번도 망설임 없이 살아 온 듯한 그의 모습은 늘 광채가 난다.
버스와 기차를 카고 전국을 돌며 동서남북을 축지법 하듯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가버리곤 하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부지런한 사람.
난 신출귀몰 하지도, 세상 분쟁에 가까이 가지도 않지만 어디든 차를 몰고 다니니 누님에 비하면 어마무시 호사다.
가슴에 앉은 암이란 놈, 위치를 보니 유두에서 제법 위다.
위치상으로 구부려 생긴 몽아리 같다만 병원에서 암이라하니 암이겠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게 일상이다. 그리고 가끔 밭에서 일도 한다.
많이 걷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구부려 등이 많이 굽고 어깨가 앞으로 많이 꺽여 가슴이 압박 받았음을 이야기 해주고 손님 무시하고 카페 바닥에 자리를 깐다.
여기 손님은 들어온 순간 부터 가족이다.
<많은 사람들을 뒤에서 보면 견갑골이 틀어져 있다. 한쪽이 위로 많이 올라가있다. 이 경우 담결리듯 아픈 경우가 많다.>
고관절 – 골반 – 어깨 – 공명 – 목
어깨를 잡아주고 통증이 있는 곳을 눌려봐 주어야 했는데 그걸 잊었다.. 확인 시켜 줌이 중요한데...
보통 유방암이 있다는 사람은 가슴도 아프지만 어께가 내려와 옆구리 윗부분도 함몰 되면서 임파선이 포도송이처럼 말려 굳는다. 그곳을 눌리면 모두 다 아파한다.
어깨를 잡아주면 통증은 엄청 줄어든다.
엎디리게 하여 좌골과 엉치 고관절을 잡는다. 누운 상태로 마눌님께 사진 찍게 한다.
확인시킨다.
- 등이 이전 보다 훨씬 더 쏫았다. ( 등이 솟으니 앞에 있는 가슴을 압박하는 거다)
어깨는 왼쪽이 심하게 아래로 내려오고 오른쪽은 위로 올라가고 솟아 있다. (왼 어깨가 이리 내려 오니 왼가슴을 압박하는 거다. 아, 또 잊었네.. 숨은 어떤가 물어야는데... 왼 어깨가 내려오면 폐 압박도 많을 건데.....)
등을 잡고 다시 목을 잡고 어깨 주변 근육을 풀어준다. 일어서서 손목 잡아 준다.
방석숙제를 권하고 어깨 푸는 법을 이야기하고 교정은 마무리한다.
한달 정도의 누님 계획을 듣고 우린 저녁 먹으러 간다.
원래 서울가야는데 환자 두고 가는 느낌이라 밥은 먹어야겟다고.
바로 근처 골목 안에 두부 집이 있는데 찬이 직인다.
우린 맛있게 먹고 다시 카페로 간다.
아까 있다 갔던 남자분은 부인과 같이 앉아 있다.
<미나리> 보러가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란다.
(누님은 일욜 미나리를 봤다 한다.)
나중 부처님 같은 자형이 오시고 차한잔 나누고 이제 헤어진다.
이 공간과의 이별은 늘 아쉽다.
여기서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책도 반권쯤 읽고 그림도 하나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여겨진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그리해야만 할 것 같은 요술공간이다.
늘 다정다감한 박샘과, 누님과도 작별하고 우린 비나리는 밤을 헤치고 서울로.
<둘 다 작년 가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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