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리의 <세상의 모든 계절> 부엌에서 피어난 정치
글. 한창호/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에 따르면 영화에 관한 한 영국은 유럽에서 한 수 아래다. “문학은 몰라도, 영국은 이상하게 영화에서는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다.” 1960년대 트뤼포가 맹활약할 때, 프랑스는 누벨바그로 세계의 영화미학을 주도하고 있었으니, 영국의 위치는 미미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동 잘하는 트뤼포가 괜한 우월감에서 영국의 영화 수준을 지나치게 폄하한 면이 있다. 특히 당시의 ‘Kitchen-sink Realism’ 영화들을 기억한다면, 트뤼포의 주장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은 실언에 가깝다.
마이크 리, 영국식 리얼리즘의 적자 Kitchen-sink Realism. 이는 말 그대로 부엌의 싱크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리얼리즘 드라마를 말한다. 하층계급 가정 내의 문제점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사회 전체의 모순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만든 사회성 짙은 드라마다. 가족 간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중심에 있다 보니, 중요한 장면들이 주로 부엌에서 진행됐고, 그래서 키친-싱크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영화의 대부분이 집 몇 채, 심하게는 집 한 채에 있는 몇 개 방과 부엌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작품들도 있다.
부엌. 우리에겐 여전히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영국의 리얼리스트들은 생존의 절대조건으로 부엌을 상정했고, 부엌에 정치성을 부여했다. 토니 리처드슨, 카렐 라이츠, 린제이 앤더슨 같은 쟁쟁한 감독들은 1960년대 영국 영화계에서 키친-싱크 리얼리즘을 이끈 선구자들이다. 잘생기고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같은 이 사회의 문제적 계급이 주인공으로 나와, 그들 특유의 투박한 악센트로, 마치 현실 그대로의 기록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덕분에 영국의 리얼리즘 미학은 확실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만 트뤼포의 공세에 맞설 영화 담론의 대중적 영국 스타가 없었던 게 그런 편견을 심화시킨 측면이 있다.
지금도 영국영화는 키친-싱크 리얼리즘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다. 적자를 꼽자면 켄 로치와 마이크 리다. 두 감독 모두 꾸준히 영국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정치적 드라마들을 내놓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런던 하층민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한참 생각하게 만든다. 두 감독의 차이점이 있다면, 켄 로치의 영화는 정치적 테마에 더 집중된 편이고, 마이크 리의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서정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 리의 영화들은 장르적으로 보자면 대개가 멜로드라마다. 가족 사이의 갈등이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2010)도 전형적인 마이크 리 스타일의 멜로드라마로, 키친-싱크 리얼리즘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런던의 영화’라고도 볼 수 있는데, 관광엽서에서 볼 수 있는 눈부신 런던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몰려 사는 경제적 빈곤 지역이 주무대다. 영화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들의 부엌을, 그리고 부엌 안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이크 리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그런 조그만 장면들을 보다 보면 사회의 불공평한 모순에 장탄식이 흘러나온다.
영화는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봄. 만화영화의 주인공 이름과 같은 톰과 제리는 은퇴를 앞둔 노부부다. 톰(짐 브로드벤트)은 지질학자이고, 제리(루스 쉰)는 병원의 심리상담원이다. 30세가 된 아들 조이(올리버 몰트맨)는 공무원인데, 부모에게서 은근히 결혼 독촉을 받는다. 제리의 병원 동료 메리(레슬리 맨빌)가 저녁에 초대받아 이 집 부엌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게 봄 시퀀스의 대부분이다. 우리는 톰이 유머 있는 남자이며, 제리가 사려 깊은 여성이고, 아들 조이도 유쾌한 성격의 청년임을 안다. 병원의 행정 직원인 메리는 아직 독신녀인데, 정서불안을 보이고, 알코올에 약간 중독됐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연애를 꿈꾸는 몽상가임을 안다. 눈치 빠른 관객은 메리의 불안이 스토리의 동력임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봄에서 영화의 주요 인물과 갈등 요소를 제시한 뒤, 곧 이야기는 여름, 가을의 순서로 발전된다. 이야기 구조는 4막의 드라마로 짜여 있고,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 무대인 겨울에서 이 영화의 절정을 맛볼 것이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마이크 리가 <비밀과 거짓말>(1996)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에야 그에게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멜로드라마의 세속적인 해석, ‘손수건 영화’를 주로 만드는 감독이라고 치부해버렸다. 눈물에 호소하는 최루성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비밀과 거짓말>에서 흑인 딸이 기구한 자신의 운명에, 자기연민을 느껴 말없이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의자에 처박혀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때 나는 이탈리아 볼로냐 시네마테크에 앉아 있었고, 관객 가운데 아마도 유색인은 나 혼자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밀려난 주변인의 외로움을 조금 알 것 같던 때였다. 흑인여성의 말없는 눈물은, 런던에 사는 유색인의 운명을 한순간 짐작하게 만들었다. 마이크 리의 드라마는 바로 그렇게 형제애의 중요함을 깨우쳐주는 순간이 있다. 그 후 나는 마이크 리의 영화를 볼 때면, 어김없이 손수건이 필요한 순간을 만난다. <세상의 모든 계절>에선 그 순간이 겨울 에피소드에 들어 있었다. 톰의 형수 장례식이 겨울의 주요 내용이다. 그녀는 평생 일만 하다 죽었다. 남편은, 곧 톰의 형은 동생이 공부할 때 놀았고, 나중에도 매일 맥주 마시고 축구 보다가 젊음을 다 보냈다. 오직 축구를 보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도 할머니에게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그 아들은 지금 아버지를 증오하는 건달 비슷한 남자로 성장했다. 장례식도 동생 톰이 오지 않았다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을 것 같다. 뭐라 그럴까? 마이크 리 영화의 비극성은 무슨 특별한 사건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그만 에피소드 안에 인물들의 비극적 조건이 다 묻어 있고, 그 운명적인 조건이 우리를 한숨짓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톰의 형 같은 조건이라면 어떨까? 마이크 리의 영화는 늘 그런 질문을 던진다. 톰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도 나오고 지질학자가 돼서 사랑스러운 아내와 착한 아들의 아버지가 됐을까? 아니면 보통의 영국 청년들처럼 주말에 축구를 보기 위해 일은 대충 때우고 지내다가, 그냥 아무 준비 없이 늙어버린 노인이 됐을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적 혜택에서 배제되고, 공이나 차고 또 구경하다가, 어느덧 늙어버린 노인(톰의 형)에게 지금의 불행은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이크 리의 영화를 보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태어나는 그 순간 사실상 한계가 정해진, 운명 속에 갇힌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곳이 설령 복지정책을 펴고 있는 서유럽 국가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마이크 리의 드라마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마이크 리의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많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은 자신의 가슴속에 뭔가 꿈틀거리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연대連帶’이든, ‘형제애’든, 그냥 타인에 대한 ‘이해‘이든 상관없이 뭔가가 자꾸 꿈틀거리고 끓어오른다.
한창호 약 10년간 기자생활을 하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으로 영화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에 7년간 머문 뒤, 한국에 돌아와 강의하고 글 쓰며 생활한다. 미술과 음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와 오페라> 등의 저서가 있다. blog.naver.com/hans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