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신문기사를 보면서 건축물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무거운 빈가방 2013. 3. 27. 08:23

 

 

동아일보는 보질 않지만 오늘 다음에 눈길 끄는 기사가 하나 있어서 올린다.

 

세계적 명성의 설게사를 ㄲ르여드려 지은 한국내에서의 외국인 설게사의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보인다.

 

옛날로 이야기하자면 시골 촌 사람이 도시에 온다고 양복을 걸쳤는데 뭔가 몸에 맞질 않는 옷으 ㄹ입은 기분이다. 아니 그것 보다 더욱 심하다.

 

설게사에게 드린 돈이 엄청날 것이다.

 

분당쪽인가? 아파트가 잘나갈 때 미국인, 일본인 , 한국인이 한군데서 설계를 하여 지은 아파트 촌이 보였는데 구조들이 모두 달라 재미있고도 특이하게 보였다.

그곳을 지나면서 선배는 한국인 집만 경쟁률이 높고 나머지는 1:1도 안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과 다르고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에 자기씩으로 건물을 짓는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처지는 깡그리 무시되기 일쑤다.

 

아래 기사에 보이는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저런류는 정부나 시에서 공모하여 짓길레 한국이나 그 지역의 역사성이 없어져 버리고 그저 비싼 돈만을 들여 자기 멋만 덤뿍 보이려 한다.

 

내가 처음 건물을 지을 때(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만... 지금가지는..) 설계사는 매우 폼 나게 설계를 했다.

그런데 조금씩 따지니 뭔가 불안함이 있었다. 제법 큰건물인데 시멘트 형태의 외벽을 했길레, 이 정도 크기의 건물로 이 소재를 쓴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처음이라한다.

 

이 친구는 내돈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이구나 라 생각했다. 

 

중,고딩 때 그림을 쪼메이 그렷던 용학형은 '63빌딩 보라. 클 수록 단순해야 멋진게다'라는 조언을 해 주었고, 나도 그럴 것 같다 공감하여 설계사에게 단순함을 요구했다.

시간 참 많이 걸렸다. 설계사는 건축주의 요구를  결국 받아드려 외벽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었다.

 

난 이건물을 최고라 생각한다. 단순함의 아름다움이 돌과 어울져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발한다.

 

설계를 한 전공자가 중,고딩 때 그림 좀 그려본 사람과 여기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의 안목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부에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다는 것은 그곳의 역사성과 지역성 그리고 실용성이 함께해야 한다.

 

외부인에게 맞길 때는 건축주(당시 서울시장일련지?)는 당연히 그들에게 역사성을 강조하고 실용성 또한 충분히 대화로 풀어내어 설계하게 해야한다.

아님 공모시에라도 이런 것을 충분히 공고하고 설계를 하게 해야한다.

 

당시 이 건축물을 짓게한 건축주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아무 역사성도 지역성도 실용성도 없다는 이야기다.

 

설게사는 건축주의 요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저런 희안한 건물들이 만들어 질까?

 

난 감히 말한다. 화려하고 괴이할 수록 건축주에게 떨어지는 가루가 많을 것이라고.

 

그러기에 그들에겐 어떤한 역사성도 필요없엇을거라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깡그리 역사성을 무시하고픈 진정한 친일적인 인물이던가....

 

* 부산에 있는 해운대 아이파크의 경우도 비슷하다. 꼭대기를 빼쭉하게 올려 밖에서는 그럴사하게 보이게 했으나 그 뒤쪽 주민은 뾰족한 꼭대기 때문에 늘 송곳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살 것이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 쏙아오른 것과 낮은 곳에서 오르게 하여  더 위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볼 때의 기분은 전혀 다를 것이다.

아마 실용성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의 현대건축]세계적 건축가들, 왜 한국 오면 졸작 만드나

세계적 명성 건축가들, 한국에만 오면 명작 아닌 졸작 동아일보 | 입력 2013.03.27 03:18 | 수정 2013.03.27 05:25



《 라파엘 비뇰리, 자하 하디드, 시저 팰리.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건축가들이다. 하지만 서울에 지어진 그들의 작품은 줄줄이 '최악의 건축물'로 꼽혔다.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 미국 건축가 비뇰리가 설계한 종로타워(3위)는 "화신백화점의 역사와 종로의 도시적 맥락을 무시했다"(이우종 영남대 교수),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짓고 있는 영국인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5위)는 "외형적 화려함만을 추구한 건축이다"(곽희수 이뎀건축사무소 대표), 팰리의 교보 광화문사옥(11위)은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역사공간에 미국 건축가가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복제해 놓았다"(신춘규 씨지에스건축사무소 대표)는 지적을 받았다. 왜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에 건물만 지으면 혹평을 받을까. 그들에게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의 잘못은 없는 걸까. 》





내년 3월 개관을 앞둔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영국 디자인 전문잡지 월페이퍼는 "눈길을 잡아끄는 멋진 건물"이라고 호평했으나 국내 건축계에서는 "장소의 성격과 일치하지 않고 건축의 존재감만을 부각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건축은 도시를 구성하는 무형적인 요소를 시각화한 것이다. 건축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가 합의한 사항들이 관련 법규, 규정, 절차의 바탕 위에 구현된 것이 건축물이다. 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이 되는 공공건축물에는 사회가 합의한 절차와 과정이 더해진다. 그 절차와 과정을 만들기 위한 협의 과정에 사람들의 시간적 공간적 욕망이 투영된다. 따라서 우리가 도시의 풍광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축물들, 즉 한 시대의 건축은 그 시대 사람들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





미국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가 설계한 종로타워(1999년). 우대성 한국건축가협회 기획위원장은 "도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군림하는 건축"이라고 평가했다. 동아일보DB

그럼에도 우리는 도시에 기념비적 건축물이 들어서면 그것이 어떤 건축가가 디자인한 것인지 궁금해한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는 유명 건축가의 작품들이 도시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신생 도시가 이미지 재건을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빅네임(big name)의 건축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 프로모션은 상당한 효과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미국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철강산업의 쇠퇴로 쇠락해 가는 작은 도시를 살린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

한국에서도 지방정부의 야심 찬 프로젝트에는 항상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외국 건축가들이 등장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2004년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 건축가 하디드가 설계했다. 민간이 주도하는 개발프로젝트라고 예외는 아니다. 최근 자금난으로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진 용산개발 프로젝트는 사업 초기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한다는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시선을 끌었다. 지방정부, 개발업자, 대기업 등 큰 자본을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는 세계적인 미식 잡지 미슐랭 가이드가 별을 수여한 레스토랑에서 고급 정찬을 맛보듯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데려온다. 이 정도는 돼야 프로젝트의 품격 있는 완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도시에 훌륭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비싼 요리를 주문하거나 잘 만들어진 제품을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근사한 건축물을 가지려면 유명 건축가의 이름보다는 건축물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 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는 항상 원활한 소통이 필요하다.

우선 건축주의 내부 소통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름난 건축가만 모셔오면 모든 것을 알아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최고의 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건축주의 결단이 필요하다. 공공건축에서는 행정기관이나 관련 위원회뿐만 아니라 시민도 건축주에 포함된다. 건축 프로그램, 즉 건축주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하게 주문할수록 더 좋은 건축물이 완성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건축주 내부의 합의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건축가와의 소통도 원만하지 못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결과물에 영향을 끼친다.

건축가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외국 건축가와의 프로젝트 진행에는 항상 소통이 큰 문제가 된다. 외국 건축가에게 우리 도시의 맥락을 관찰하고 분석할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외국 건축가의 작품에는 '역사와 도시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또 어떤 건축적 요구를 할지 우리 내부의 합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건축 과정에서 설계 변경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들이지 않아도 될 사회적 비용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유명한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도 괜찮은 결과물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의 다른 도시에는 멋진 건축물을 수차례 구현한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유독 한국에선 세계적 명성을 의심케 하는 결과물을 내놓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나올 경우 그것을 설계한 건축가를 의심하거나 비난하기보다 그 건축물에 비친 우리 자화상을 반추해야 하지 않을까.

한은주 SPACE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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