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쑥하게 차려 입은 청년이 파리의 궁전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내레이션을 들어보면 그는 프랑스 파리에 유학 온 미국인이고, 그가 지금 가려는 곳은 파리의 샤이오궁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은 앞으로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처럼 시작된다. 미국인 매튜는 시네마테크에서 쌍둥이 남매 이자벨과 테오를 만난다. 그 장소는 시네마테크 앞마당으로, 시네필들이 무엇인가 때문에 집회를 하고 있다. 프랑스 68혁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앙리 랑글루아를 복직시켜라
표면적인 해임 이유는 직무를 충실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반골 기질이 강했던 시네마테크를 드골 정부가 직접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누벨바그 감독들은 랑글루아의 해임에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어 시위에 나섰으며, 유명 감독들과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랑글루아의 복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앙드레 말로에게 보냈다. 랑글루아 해임 사건은 세계적인 이슈가 됐으며, 결국 같은 해 4월 랑글루아는 복직됐다.
프랑스 68혁명의 시발점 낭테르
상황의 반전은 경찰에 의해 몇몇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일어났다. 무관심했던 일반 학생들이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는 급격히 확산됐다. 결국 소르본느 대학은 3월 28, 29일 낭테르 대학의 폐쇄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다시 한 번 시위대의 결집에 불을 당긴다. 이번엔 낭테르의 교수와 젊은 조교들까지 시위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낭테르 분교는 5월 2일 폐쇄되고, 시위의 불길은 소르본느 본교로 옮겨간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견 랑글루아 사건과 낭테르 분교 사건은 그렇게 커다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학생들은 랑글루아 사건을 통해 조직적인 운동과 연대가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갖게 되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일 이전에 랑글루아 사건이 드골 정부의 뜻대로 지속되고 무마됐다면 낭테르 분교 학생들의 결집도 그렇게 튼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소르본느 본교로 옮겨진 집회는 5월 3일 장기적인 운동을 이끌 학생행동대가 결성되는 한편, 학교 측이 경찰의 학내 개입을 요청해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게 만들었다. 학내 문제가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된 계기는 5월 6일 시위에 있었다. 2만 명의 학생들이 행진을 하는 동안 경찰은 진압에 나서 422명의 학생들 체포됐다. 이를 지켜보던 중등교육교원 전국조합은 학생들과의 연대 의사를 밝혔으며, 5월 7일에는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5만여 명의 시위대가 ‘꼬뮌 만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경찰은 무차별 해산에 나섰고, 프랑스 전국학생연합과 전국고등교육요원조합은 무기한 파업에 들어간다.
5월 10일에는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시위대는 격렬한 투석전을 펼치며 경찰에 맞섰다. 이윽고 5월 11일 노동총동맹은 학생들과의 연대를 결정하고, 5월 13일 24시간 총파업을 결의한다. 이로써 학생과 교사, 노동자의 공동시위대가 결성되고, 학생운동으로 시작된 5월 혁명은 노동자의 문제로 옮겨지게 됐다. 결국 14일부터 18일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공장 점거 투쟁이 일어나고, 24일에는 1,000만 노동자의 파업으로 프랑스 전체가 뒤흔들린다.
한편 1946년 시작된 칸국제영화제는 5월 개막을 했지만 프랑수와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 등은 영화제 중단과 노동자 및 학생과의 연대를 주장했다.
고다르는 노당자의 현실과 투쟁을 담지 못한 영화인들의 반성을 일깨우는 연설을 했으며, 트뤼포는 칸국제영화제의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5월 혁명의 결과는 드골 정부의 총선거 전략과 조직 내 분열로, 6월 총선거에서 드골 정부가 승리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상상력에게 권력을!두 달간 진행된 68혁명은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닌다. 68혁명의 시발점이 된 대학생들은 대부분이 전후 세대로서 이전 세대와 뚜렷한 구분을 갖는다. 프랑스는 1959년 드골이 대통령이 된 후 장기집권하면서 경제적 안정을 가져온다. 68혁명의 중심이었던 대학생들은 드골 정부가 이룩한 경제 혜택을 누렸지만, 반면 강력한 정부를 이끌었던 드골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도 히피 문화가 유행하고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있었으며,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도어즈 같은 록 그룹의 음악과 <400번의 구타> <네 멋대로 해라> 등의 누벨바그 영화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유주의와 저항 정신을 심어 놓았다. 강한 정부에 비례에 자유를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 젊은이들의 저항이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5월 파리를 수놓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저항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일었다. 서유럽에서는 반전, 반권위, 반정부 시위가, 동유럽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이, 제 3세계에서는 반제, 반독재 투쟁이 있었다. 68혁명이 가져온 다른 두 가지의 주요한 변화는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의 연대의 길이 열렸다는 점과 여성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변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69년, 반항하는 일본의 영맨1969년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는 즐거운 청춘들의 이야기 <69 식스티나인>은 68년 호된 시련을 겪었던 드골이 1969년 4월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해 사임한 몇 개월 뒤에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켄과 아다마, 이와세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15일에 뉴욕주 북부 화이트 레이트의 야스거 농장에서 열렸으니 8월 말쯤이 아닐까 싶다. 이 당시 일본 상황은 켄이 사랑하는 ‘얼짱’ 카즈코의 한마디에서 알 수 있다. “데모하거나 바리케이드 치는 사람, 멋져!”
데모와 바리케이드는 일본의 1960년대를 따라다녔던 단어다. 전후 빈곤 상황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의 시대를 열고 있던 일본은 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이 미일안보조역의 개정을 두고 반대 운동을 하면서부터 향후 10년간 학생 운동의 회오리에 휘말린다.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학생 운동은 1963년 대학의 등록금 투쟁 등을 통해 일반 학생들을 끌어들여 학내 문제에서부터 점점 정치 문제로 눈길을 들리게 만들었다. 각 대학 학생자치회는 전학공투회의(전공투)를 결성했으며, 강경 투쟁 노선 활동가가 중심이 되면서 학생 운동은 폭력적 성향을 띠게 됐다. 전공투 학생들은 시위 때 우리의 8,90년대 시위대처럼 수건으로 복면을 했다. 물론 최루탄의 흡입을 최대한 막거나 경찰의 카메라로부터 노출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각 대학들은 1964년 등록금을 인상했는데, 이때부터 와세다를 비롯한 몇몇 대학은 총학생 동맹파업에 들어간다. 한편 이때부터 의자와 책상을 가지고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경찰의 학교 건물 폐쇄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68년 겨울, 동경대 의학부가 동맹파업에 돌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학은 이중 17명을 제적시켰는데, 이때 전공투는 동경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나 기동대가 투입되어 금방 쫓겨난다. 이에 법학부 외의 전 학부가 야수다 강당을 재점거하여 전공투를 결성해 격렬한 운동을 벌였다. 동경대와 함께 니혼대의 학생운동도 극렬했다. 니혼대는 용도불명의 비자금 때문에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다. 대학 측은 학생 15명을 제적시켰고, 학생들은 전공투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때 니혼대는 우익단체 학생들을 동원해 대응하게 만든다. 우익은 흉기로 무장해 전공투를 쳐들어가는 등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결이 벌어졌다.
이제 <69 식스티나인>의 시기적 배경인 1969년. 1969년 1월 18일 학생들이 점거하던 동경대 야스다 강당에 기동대가 투입된다. 학생들은 화염병으로 맞서고 631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대학 분쟁의 쇠퇴에 이른다. 이후 69년 가을을 뜨겁게 달군 사건은 우리에겐 다큐멘터리 <산리즈카 7부작>으로 유명한 산리즈카 투쟁이다. 일본 정부는 수도권에 국제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산리즈카에 공항을 건설하기로 했는데,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정부에 주민들은 분노했다. 산리즈카 주민들은 공항반대동맹을 결성했으며, 이 운동에 많은 학생이 참가해 투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은 점점 내리막길을 걸었고, 이후 전공투와 같은 강경 투쟁의 학생운동은 사라지게 되었다.
1969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것들
미니스커트 1967년 트위기가 일본을 방문한 이후 대유행이 되었다. 1969년 당시에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부인 사토 히로코(당시 62세)도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미니스커트는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타이거 마스크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프로레슬링 만화 ‘타이커 마스크’. 가지와라 잇키가 1968년 연재를 시작해 1969년엔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고고 댄스 당시 일본의 전 국민은 고고 열풍에 빠져 있었다. 미소라 히바리(일본 엔카의 여왕)의 ‘불타는 태양’의 백댄서도 고고를 추었을 정도. 고고는 1970년대 후반 <토요일 밤의 열기>로 디스코가 유행하기 전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오쿠무라 치요 복고풍 섹시 대중가요의 대혁명을 일으킨 가수. 1965년 ‘나를 사랑해줘’로 데뷔했으며, 1969년 ‘사랑의 노예’ ‘사랑도둑’ ‘사랑에 미쳐’ 등의 사랑 3부작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매디슨 스퀘어가든 백 당시 일본의 젊은이라면 하나쯤을 가지고 있던 스포츠 가방. 책과 옷가지 등을 모두 넣을 수 있는 다목적 가방으로, 활동적인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