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 백범김구선생 - 일본놈의 그 긴 암살시도에도 살아남으셨는데....

무거운 빈가방 2012. 11. 5. 00:30

아아 백범 김구 선생 (1960) Ah! Baekbeom Kim Ku

 

 

http://www.youtube.com/watch?v=op8-77B0-uc

 

 

김구선생님의 육성(1946.8.15) (소리가 잘들리지는 않음)

 

http://www.youtube.com/watch?v=mmj_dx6LqTI

 

 

독립운동가 감독이라! 

 

참설레이는 감정으로 영상자료원을 찾았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너무도 귀한 감독 아닌가? 

 

영화 등 예술계는 일본 유학을 기본으로 하였고 그러다 보니  친일 성향을 많이 가지게 되고 그 성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일본인 보다 더 일본인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지금도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시대!

 

그 그늘이 엄청 깊은 현재의 상황에서 독립운동 감독이란 것만으로 마음이 찌릿하다.

 

그는 김구선생님을 어떤식으로 표현할까?

 

무려 143분이란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만으로도 감독은 선생님께 존경의 표현을 다 한듯이 보인다.

 

어릴 때 보았던 '상해임시정부' 아마 박암이 출연했던 이 영화에서 노모에게 회초리를 맞는 장면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것 보다 더 오래된 흑백영화다.

 

동학혁명으로 부터 시작하여 상해로, 남경으로 , 옮겨다니며 독림운동을 유지하다가 미군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여 총탄에 쓰러지기 까지의 장면들

 

첫장면이 암살 당하는 장면인데 눈을 감으시기 직전 책상에다 주먹을 몇차레 내리치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다.

 

그 긴여정. 일본이 암살하려고 그리 노력을 했지만 무사했던 독립의 투지를 보여온 선생님이 그를 방문한 한국인의 총에 쓰러지시니 돌아가시기 그 순간에도 고국이 무너지는 비통을 맞보앗을 것이다.

 

첫장면은 이렇듯 감독의 분노로도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함께 해방운동을 하던 젊은이들도 희망을 점점 버리게 되고 오히려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만

 

그를 잠시라도 만나 함께 한 이들은 그의 인품과 의지에 감복하여 결국 총을 놓고 그의 신봉자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아하통재라!

 

그를 보지 못한 만나지 못한 이들은 , 일본 보다 더 일본적인 매국노와 함께 했던 이들은 오히려 김구선생을 요새 말로 테러리스트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긴여정을 흑백화면 속에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영화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도 있어 보인다.

 

당시 예산이 거의 없었을 것인데 이리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던 힘은 오직 감독의 의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흘러간 옛 향수 처럼 젊은이들에겐 잊혀져 가는 김구선생님.

 

그리고 정의로움에도 무조건 딴지를 걸어 이념분쟁으로 몰고간 저 매국노들의 활약과 메스컴에 중독된 이 시절 때문에

 

관객들도 거의 없다.

 

마친뒤 20여명 관람객. 젊은이는 나와 하나더 ㅡ 나도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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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시대극 | 한국 | 143 분 | 개봉 1960-12-31

 

감독 전창근

출연 전창근 (김창수 / 김구 역), 조미령, 윤일봉 (윤봉길 역), 주증녀, 신영균

 

 

 

 

줄거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김창수(전창근)는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울분을 느낀 그는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감옥에 간다. 탈옥한 김창수는 민중들을 교육하고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며, `김구'로 개명한다. 다시 투옥된 김구는 가출옥된 뒤 중국으로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지휘한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윤봉길(윤일봉)의사 의거, 장개석과의 만남, 광복군 창설 등을 지휘하는 김구는 따뜻한 형제애와 투철한 민족정신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앞장선다. 8ㆍ15 해방이 되면서 그는 조국으로 돌아온다.

 

 

 

1908 함북 회령~ 1975.

영화 배우·감독.

 

전창근

희곡작가와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했다.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에 신인배우로 입사, 그 영화사가 2번째로 제작한 〈개척자〉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윤백남프로덕션이 해체되자 새로운 활로를 찾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 중화학원(中華學院)과 무창대학교(武昌大學校) 시절 소설가 김광주, 독립운동가 김구 등을 알게 되어 싼이학교[三一學校] 교사로 일하는 등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929년 감독 이경손이 상하이로 망명한 데 이어 촬영기사 한창섭과 배우 정기탁도 건너왔다. 이에 남양영화사는 각본·감독 이경손, 주연 전창근, 촬영 한창섭의 참여로 영화 〈양자강〉을 제작했다. 국내에도 공개되어 인기를 얻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전창근은 중국영화계에서 기반을 다졌다. 이어 상하이파이싱영화사[上海派星映畵社]에서 제작한 〈대지의 비극〉·〈초악〉·〈춘시〉 등의 감독을 맡았고 1938년 귀국했다. 중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도 알려져 고려영화사 작품 〈복지만리〉의 감독·각본·주연을 맡았고 1941년 개봉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곧 상하이에서의 항일활동 때문에 체포되어 해방될 때까지 영화활동을 중단했다. 8·15해방 후 〈해방된 내고향〉(1947)·〈여인〉(1948)·〈낙동강〉(1952)·〈마의태자〉(1956)의 각본과 감독을 겸했으며, 〈단종애사〉(1956)·〈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에서는 감독 및 출연, 〈자유만세〉(1946)에서는 주연을, 〈3·1독립운동〉(1959)에서는 감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