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계몽주의 등 낭만의 토대 봄. 3 2015. 9. 6토
리전 이 큰 변화 가져옴. 결과물이 프랑스혁명. 미술사 로코코. 혁명시 신고전주의.
유럽여행. 미 백악관.. 하얀기둥.. 심플 발란스 깔끔 잘빠지면서 권위. ㅡ 신고전주의.
지구상 제일 많은 것들이 신고전주의 형태. 이만큼 나폴레옹 시절에 정치적 의도가 미술 건축 등에 잘 표현. 나폴레옹 본인이 시각미술이 정치에 얼마나 잘이용되는 가를 잘알앗음. 19시 전반부 18시후반부 ..신고전주의. 물론 뿌리는 로마시대다.
르네상스는 로마만큼 그리 권위적인 시대 아니다. 단백하고 억누르듯 하진 않는다.
1. 낭만주의 테마 ㅡ 이성에 반하는 현상 풍경화 봄.. 프리드리히. 우리가 아는 풍경과 전혀 관계없음. 자연의 아름다움. 산. 강. 평등. 이런 것 말고. 로코코의 시각적에서 더 이상화시킴.
관찰없이 방안에서만 상상력으로 자기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투사하여 가짜 그림. 꿈같은 풍경이다.
시각으로 자연관찰 위해 르네상스는 스펙트럼(원근법 등), 자연과 가까이하고 유사성 가지려고 이후에도 더 이상 노력했는데..
'해변의 수도승' 보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림.
프리드리히의 마음속에 어떤? 이 무한정 무한대를 이성으로 재려고 하지 마라. 결과적으로 신적인 것 많이 있음. 그래서 기본적으로 보수반동이 생김. 이성과 혁명으로 신의 중심적인 것들을 바꾸었는데 다시 돌아가려함. 전혀 다른 풍경화가 그려짐.
오늘 대단히 중요한 '도플갱어'를 봄 Doppelgenger
2개(도플)가 걷는다(갱어). 주체의 문제. '내'라는 주체는 단일 내 안에 내가 주인, 성격규정 가능.. 이렇지 않으면 정신병 분열 된다. 보통은 주체 생각 안하고 편하게 살아감. 증명하는게 아이덴티티.. 아이덴티티카드. 서양아이들 눈색깔 까지 이야기
여기에 본격적으로 회의. 홍길동이 나 맞는지. 오해아닌지. 분열이 정상적인데 이 사실을 수용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이성이 무너지고 최소 균열이 일어남.. 이전에도 있었음 '나르시스'도 분열의 출발인데. 특정 작품, 작가에게서 나왔는데 19세기 되면 무지무지하게 쏟아져 나옴..
자살하는 일이 많이 일어남. 동반자살.ㅡ일본소설도 많이 나옴. 베르테르가 대표적. 롯데 사랑했는데 남의 여자고.. 실현 안되니 슬퍼하고 세월 지나면 변절될 것이니 불안. 이 순수한 마음이 영원히 유지되야 한다. 이게 베르테르마음이다.
세월 지나며 잊어버리면 되는데 이게 안된다. 1700년 후반(1774)에 나왔는데..
'나'라는 주체에 대해 광범위하게 고민하는 것이 나옴.
낭만주의는 제일 큰 토대가 '꿈'인데.. 꿈같은 생각에서 나온게 분신.. 악령. 등 충격적임. 자살. 방화 등. 쇼킹한 것들.
이게 동양문화에 퍼득 떠오르는 작품이 없음. 김동인 소설에서 좀 보는데, .. 일본소설 다 빼긴것..
우리 때는 대학 가자마자 역사관련 많이 읽음. 학교서 다 거짓말이었으니. 전환시대의 논리 읽으며 많이 놀람. 김윤식 한참 활동시 김동인, 염상석, 이광수 등 한국문학에 대해 글쓰기 시작 83년도 정도.. 김동인 좋아했었다. 당황스러움과 실망감. 배신감.. 대부분 다 빼낌. 기가찼다. 친일청산 못한 부끄런 역사 가지고 있으니...이런 과거를 부끄럽지 않게 해결한 나라 많이 없다. 서구는 자기들은 했으니 큰소리. 이탈리아 독일도 경제 쪽은 못함. 대표하는 차들이 다 전쟁 때의 차들.. 전쟁 후 먹고 살아야하니. 정치는 부끄럽지 않게 함. 최근 암살. 친일 청산 문제.. 손가락하기 어렵다. 모두가 책임있다.
분신.. 우리문화에 참 없다 하다가 이까지 왓네... 충격적인 것 김동인이 잘썻다. 다 빼낀거지만..
독일낭만주의의 분신
영화 데이비드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영화배우 지망생 두여인 우연히 사고로 만나 우정을 나눈다 두 여성의 정체성은? |
첫영화 춤추는 장면 한갠지 두갠지.. 나오미 왓츠 백인여성 얼굴 잠시 보이고..
캐딜락 타고 가다 사고. 죽이려하다. 아마도 누구한테라도 걸리면 안될듯.. 나오미의 친척 집으로 숨음.
사진 2장.. 나오미가 도와줌.
거울 리타사진... 바라봄.
후반부 장면. 둘이 거울 봄. 보호해주고 외출 함 한다. 금발 가발 씌워서 같이 보고 있음. 왠지 두사람이 아주 유사해 보임. 서로 살짝 놀람.
데이비드 린치 .1946 팬실베니아 미술학교 .1977 장편데뷰 일레이저 . 1986 블루벨벳 1990 화이트 앳 하트(광란의 사랑) 칸황금종려상 1990~91 . tv |
거울 분신 .반사된 이미지 . 또 다른 자아 . ㅡ분신 . |
또 다른 누구인가? 이러다 허구 만들어지고 발전함.
이리 생각하는 게 예술가적.. 자가 나인가 의심 시작..
그 다음 부터 할 이야기가 계속 나올 듯.. 이러다 보니 지킬과 하이드가 나오는 것..
게오르규 프리드리히 케스팅
Georg Friedrich Kersting At the Mirror 1827 거울 앞에서
낭만주의 이전 거울 비쳐 보는 것 거의 없음.
이 땐 이것만 그린 것 아니다.
거울 보면서 자기를 쳐다봄.. 자기 내면을
지난시간 동???이라는 맥락인데 저런 태도가 계속 쌓였을 때 뭔가 나온다 .
내면을 비춰보는 기분. 전체적 맬랑꼴리가 느껴짐..
그림 나오고 문학도 나오기 시작
Christoffer Wilhelm Eckersberg Woman standing in Front of a Mirror 1841
이건 누드화. 거울 본다고 다 성찰은 아니다. 여성의 등이 더 강조. 앞의 그림과는 다르다.
프로이드도 거울로 부터 시작 10대 때 거울에서 자기를 쳐다보기 시작..
판도라 (1951) 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 : 영화의 전당에서 '판도라'를 보면서 거울과 그림 속의 또 다른 자아를 보면서 이런 것도 낭만주의와 관련 있지 않을가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도 전설, 바다와 풍랑,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분신 분열적인 것이 19시 급격히 발전..
e.t.a호프만. <악마의 묘약> 1814환상문학의 대가. 소설은 환상소설만. 작곡 음악비평. 오케스트라 지휘자. 이 소설이 불을 당김.
분신 * 그리스 나르시스 * 19시 독일낭만주의 * 호프먼 악마의 묘약 1814 환상소설 * 수도승 악마의 묘약을 마신 뒤. 세속의 길. 우연히 자신을 닮은 백작만남 그 사람인척 정체성 혼돈 살인 등 온갖 악행.ㅡ특히 섹스. 도플갱어의 등장 * 꿈의 구조처럼 복잡하게 이야기 전개 |
야들은 약먹는 것 참 많다 약먹고 바뀐다. 서양인이 동양인 보다는 빨리 적극적으로 나를 다른 무언가로 변신 시킬 수 있다는 고민 많이 함. 그거 함 해보고 싶다.. 할 때 동아시아는 안해버지만 그리스 시절부터 시도. 그게 약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포도주. 포도주 마시고 적었더니 전혀 다른 시인이 되더라...
운동선수 약먹고 기록. 예술가들 약먹고..비틀즈 다 약먹고 만들었다. 발군의 학자들 약먹는다 생각한다. 7박8일 내 능력의 120프로 발휘 가능..
동아시아는 약에 대해 엄격히 규제 범죄화...사회 병들게하는 부분 분명히 있다. 약의 최종적 이익은 결국 대자본 권력. 왜 남아메리카에 약이 많을까?
사람들 자기 못알아 보면 사람이 나쁜 짓을 많이 한다. 남자는 섹스에 관해..
30페이지 읽으면 잠들듯.. 꿈이 꿈꾸듯 쓴다. 문장도 악몽처럼 쓴다.
도스토에프스키도 호프만 꺼 보고 적음〈이중인격 Dvoynik〉(1846)
로버트 스티븐슨 . 지킬박사와 하이드 1886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1890
문제는 약.. 먹으니 미스터 하이드로 변함. 폭력 등 행사.. 불행의 시작은 뭔 짓 했는지 기억이 난다는 것. 자꾸 한다. 약을 계속 먹다 나중 지킬로 못 돌아감.
지킬이 관섭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이드 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음. 우린 그러지 절대 못하는데.. 무의식 세계의 주체로 분신을 말할 때 하이드 이야기 제일 많이 함.
분신의 형태가 억압된 것이 나오는 것이 제일 많다..
도리안 그레이 콤플렉스 .오스카 와일드 도레안 그레이의 초상 1890 영원한 젊음의 욕망 . 젊은 도리안. 하이드 처럼 악행 20년간 무의식의 주체로 곧 소원성취하며 살았다.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는것. 곧 소원성취 . ㅡ 무의식의 주체 통제 못하면 . 파멸 |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 1945) 분신. 무의식의 주체 .로버트스티븐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1886 . 억압된 것의 귀환. 무의식의 주체 ㅡ정신 분석의 인기 테마 . ㅡ파우스터 처럼 메피스토에 끌린다. |
초상화도 나의 분신인데 소원성취 엿다. 이거 다 합한 것이 파우스트이다. 존경 받는 학자자...되고 싶었는데 못된 것.. 되고 싶은것.
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멀홀랜드드라이버 . 오디션과 더빙 .ch 13.14 . 약 15분 |
올리비에 아사야스 클라우즈 실스 마리아 2014 도입부 10 연기 51분 부터 10분 장만옥과 7.8년 부부 |
스위스 유명 휴양지. 니체가 말년 10년 여기서 보냄
몰홀랜드드라이버와 비교될 정도로 복잡
예술과 허구 현실과의 관계들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함.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다. 떨어진 것처럼. 벽이 있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들. 분신도 생각나게.
미워하는 사람을 친구가 비슷하다고 할 때 쇼크.. 미워하는 그 사람이 니다.. 그런 것들. 내 속에 숨겨진 것이 틔어 나오는 것.
낭만주의 시대 그림. 이탈리아와 독일인
갈색. 금발.
르네상스. 고딕. 반 짤라서 분리도 가능. 사실 하나인데 나눠져 있는 것... 이리 생각해도.
파우스트에서 튀어나온 메피스트.. 낭만주의자는 하이드 처럼 봄.. 파우스트가 메피스트 처럼 못하는 것이 없음. 맴시 있고 젊음. 괴테 음탕한것.. 예술사에서 챔피언 말하라면 괴테와 피카소 1.2위
DELACROIX Faust and Mephistopheles,
DELACROIX Faust meeting Marguerite, 1828
. 거울과 분신 . 정신분열적 캐릭터 . 광기. 일반적잊지 않은 성격 ㅡ 천재의 한요소? . 미셀푸코 . 광기의 역사; 19세게. 새로운 수용소의 탄생. 의학 (과학의 이름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 등을 정상이 아닌 사람, 정신병자를 구성해낼 때.) .ㅡ 아우슈비츠? |
분기 . 광기. 천재
광기와 천재성의 연관은.. 어이 보면 이젠 고전이다. 과거에는 60.70년대는 같이 살았다. 길가면 꼭 미친 사람 있었다. 유럽도 그랫다. 특히 나폴레옹 시대 이후. 영. 프에서 비교 안될 정도로 수용소 늘어난다. 정신병이란 병명으로 감금 시작
푸코가 광분 한 것은..
병이라는 이름으로 소수 세력을 격리 시키는 것에 분노. 유죄임. 짚시. 동성애자. 수용소 넣음
정신병 판정도 참 모호. 같이 살아도 되는데.. 당시 수용소 사람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고픈 사람이고 다 감옥이다. 이 클라이막스가 아우슈비츠다. 이 현상이 19세기 때 맞물려 나온것..
19세기 관련 정신병동 영화 많음. 사회적 현상
눈 빛 혼들린 듯.. 공동묘지.. 혼들린 아이.
DELACROIX Girl Stead in a Cemetery 1824
19시 폐병 20시 에이즈..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병원 만듬. 그런 현상이 사회적으로 주목 장면. 동방의 제사장 메디아가. 나르고 배를 타고 황금양털을 가짐 그리스 영웅에게 반해 도와줘 배신 이야손 따라 그리스로 옴. 배반, 자기 아이 죽임
DELACROIX Medea about to Kill her Children1838
쇼팽, 병들림 곧 죽음, '미완성‘ 이것이 낭만주의의 매력. 진짜 미완성인지? 왜? 미완성이 의도적일 수도.
슈벨트 <미완성> 진짜가? 미완성 자체가 끝난 것 아닌가?
19시 낭만주의에 타소가 부활 (1544.3.11 ~1595.4.25)
건강, 생명과 글을 바꿈.
존경심이 있었을 것 걸작을 남기기 위한 염원으로 생각함.
미켈란젤로를 좋아함.. 괴테이야기도 괴테는 고전주의이며 낭만주의자임
외젠 들라크루아 - 천재. 낭만주의
DELACROIX Michelangelo in his Studio1849
DELACROIX The Death of Sardanapalus
사르다나의 팔리스왕
의자왕과 비슷, 패배직전. 침대 위에 행복했던 것 다 가져 오라함. 말. 여자. 침대 불질러 자살..
낭만주의 좋아할 테마. 고전주의자의 발란스 균형 이런게 아니라 복잡함. 복잡하고 다이나믹한 표현. 영향 많이 미침.
아이덴티티. 정체성. 카드 하나로 증명할 하나의 주체로 산다. 이래야 평화롭다.
그런가 하는 의문을 아주 적극적으로 개진한 사람들.. 결과적으로 예술이 풍부해짐. 예술과 현실. 허구 경계 무너진게 꿈.
그런데 꿈에서 꿈. 꿈의 재료도 낮에 있었던 것의 연장선일 경우 많음.
20세기 전반부에 ‘브레히트’가 나옴. 일목 요연하게 정리.
기승전결 식인데 브레이트는 이것을 부정. 1930년대 부터 이론 증명 시작..
한국남자 군대 가는 게 선인가? 20년 전 분명.. 지금은?
분열된 주체... 받아드리기 시작.. 이러면서 미래로 조금씩 가는 듯..
내일.. 스페인 영국으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014) Clouds of Sils Maria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실스마리아
질투와 도발, 순수와 열정이 충돌하는 그녀들의 눈부신 무대가 시작된다!
스무 살 시절, 연상의 상사인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젊고 매력적인 캐릭터 '시그리드' 연기로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마리아 앤더스(줄리엣 비노쉬).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연극의 리메이크 버전에 출연 제의를 받게 되지만,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주인공이 아닌 나이든 상사 헬레나.
리허설을 위해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함께 알프스의 외딴 지역인 '실스마리아'를 찾은 마리아는, 관객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시그리드'로만 남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시그리드’보다 솔직하고 인간적인 ‘헬레나’의 매력을 어필하는 발렌틴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급기야 새롭게 ‘시그리드’ 역을 맡게 된 할리우드의 스캔들 메이커조앤(클로이 모레츠)의 젊음을 동반한 아름다움마저 질투하기 시작한 마리아는,그녀에게서 불안하고 이기적이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지는데…..
과연, 그녀의 무대는 무사히 막을 올릴 수 있을까...?
E.T.A 호프만
1776년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 법학을 공부하여 1822년 46세를 일기로 베를린에서 사망하기까지, 낮에는 빈틈없는 법관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이중 생활〉영위했다. 작품으로는 장편 소설 「악마의 묘약」,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외에 작품집 『세라피온의 형제들』, 『야상곡』, 동화 『브람빌라 공주』, 『마이스터 폴로』등이 있다.
환상문학을 읽는 이유? 인간 욕망의 내밀한 구석을 건드려주는 작가의 예민한 더듬이에 기인한 바 크다. 호프만 등 그동안 문학의 주변부에서 유령처럼 맴돌던 19, 20세기 환상소설 대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고딕소설의 효시,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페미니즘문학의 대가가 쓴 공상소설 등, 낭만적이면서도 축축한 환상문학 7편을 만나보자.
이 책 <악마의 묘약>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가 낳은 천재 작가 호프만의 장편 소설로, 영국의 고딕 소설에서 발전된 독일의 괴기소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면서도 18세기 괴기소설의 다양한 모티프들과 함께 정신병리학적 현상, 그리고 기독교적 요소가 소설 전체에 짙게 깔려 있는 소설이다.
금지된 약물인 '악마의 묘약'을 마시고 세속적 욕망에 영혼을 빼앗긴 수도사 메다르두스. 수도원을 탈출한 그는 우연히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빅토린 백작을 만나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 후 백작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그는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자신을 악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광기의 정체에 눈을 뜨는 한편, 죽은 줄 알았던 빅토린이 도플갱어의 모습을 다시 나타나자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얼마 후, 우연히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숨겨진 비밀스런 화가의 기록을 통해, 자신이 살인, 간통, 치욕,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가문의 후손이란 걸 안 그는 자신 안에 숨은 악의 근원을 들여다 보며 전율한다. 이 작품은 괴기소설의 재미와 아울러 죄와 숙명, 정욕과 경건, 광기와 정체성, 자아인식과 세계인식, 예술과 현실같은 신학적, 철학적, 미학적 문제들을 결합시켜 단순한 괴기소설에서 벗어나 독일의 장르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데이빗 린치 David Lynch(David Keith Lynch)
출생 미국 몬타나 미줄라 (Missoula, Montana, USA)
데뷔 1966년 영화 'Six Men Getting Sick'
데이비드 린치는 컬트 영화감독에서 주류 영화감독으로 부상한, 70년대에서 90년대로 이르는 미국영화의 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다. 린치의 장편영화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가 77년 가을 뉴욕의 시네마 빌리지 영화관에서 개봉됐을 때 첫날 관객 수는 25명, 둘째날은 24명이었지만 81년까지 꾸준히 장기상영했고 급기야 심야극장의 인기 상영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소수의 지지를 받던 린치는 <엘리펀트 맨>(1982)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르면서 단박에 주류영화의 복판에 진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90년 린치가 연출한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 픽스>는 미국 전역에서 굉장히 성공했다. 평론가 짐 호버만이 "70년대에 대학생들이 심야극장에 가서 <이레이저 헤드>를 봤다면 90년대에는 텔레비전으로 토요일 저녁에 <트윈 픽스>를 본다"고 평했던 대로 린치는 비주류의 컬트를 대중문화의 유행으로 만들어놓은 괴력의 소유자다.
린치는 46년 미국 몬타나주의 미술라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사고가 개방적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 린치는 보스턴 예술학교에 진학했지만 낙제했으며 유럽에 갔다가 열흘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버지니아로 가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취직한지 며칠만에 해고당하고 그러면 다른 직장에 취직하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필라델피아로 가서 펜실베니아 미술 아카데미를 다녔다. 이때부터 린치는 처음으로 흥미를 갖고 68년 <알파벳>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었다. 대학을 나온 후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거기서 16mm 단편영화 <할머니 The Grandmother>(1970)를 찍었다. 그리고는 대도시를 무대로 기형아를 낳은 젊은 부부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궁리하다가 71년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원래는 6주 안에 촬영을 마치려고 했지만 제작기간이 5년 넘게 걸렸고 77년에 가서야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이레이저 헤드>다.
두 번 보기 힘든 내용과 이미지로 채워진 <이레이저 헤드>는 개봉 당시 언론의 악평에다 흥행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망신고를 받았지만 심야극장에서 인기있는 컬트 영화가 됐다. 평범한 듯 보이나 그 안에서 솟구치는 이상향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린치의 재능에 주목한 감독이자 제작자인 멜 부룩스는 린치를 헐리우드로 초청해 <엘리펀트 맨>의 연출을 맡겼다. 이 영화는 19세기에 실존했던 존 머릭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역시 기괴한 것을 사랑하는 린치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존 머릭은 끔찍한 외모를 지닌 기형적인 인간이지만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마음이 지순하다. 그러나 존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잔인한 대접을 받으며 죽어간다. 린치의 다음 작품은 SF영화 <사구>였다. 스파이스라는 물질을 둘러싸고 미래세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다룬 영화였는데 내용도 어려웠고 흥행에서도 참패했다. 86년 작품 <블루 벨벳>은 <이레이저 헤드>의 계보를 이어서 평화로운 미국의 어느 소읍을 배경으로 미국 중산층 내부의 음침하고 병적인 일상을 담았다. 그리고 린치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89년에 제작을 시작한 <트윈 픽스> 텔레비전 시리즈는 공전의 히트였고 90년에는 '컬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들으면서 칸 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빙빙 돌며 악취미로 대중을 공격하는 컬트 감독으로선 보기 드문 명예와 인기를 얻은 셈이다.
린치는 중산층의 잘 정돈된 행복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미국사회의 집단 무의식 속에 짓눌려 있을 것 같은 악몽의 이미지를 곧잘 끌어와 영화로 만든다. 악몽의 영화적 테제는 <로스트 하이웨이>(1997)에서 처럼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없애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파격적인 이야기 실험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평론가 조나단 로젠바움은 후기 린치의 영화가 "엘비스 프레슬리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옛날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체계적인 유희를 즐기며, 컬트 영화의 공격성은 많이 누그러뜨렸다"고 질책했지만 그렇다해도 린치의 영화는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고 평온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대다수 헐리우드 영화의 멋과는 다른 재미를 추구했다. 특히 중산층의 정신병적인 심리적 긴장을 읽어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데이빗 린치가 현대 미국영화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영향력은 평론가 짐 호버만의 논평으로 잘 요약된다. "린치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스필버그의 달콤한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책을 제시했다. 지식인들은 스필버그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황당함을 린치에게서도 느꼈다. 그러나 스필버그 식의 환상은 아니다. 린치는 스필버그적 세계관에 대한 분명한 해독제를 제공했다"
(김영진/1999.09.03)
http://cafe.daum.net/seoulsasaeng/GqCo/1921?q=delacroix&re=1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Victor-Eugene]
1798. 4. 26 프랑스 샤랑통생모리스~1863. 8. 13 파리.
들라크루아의 색채사용법은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고, 1832년에 모로코를 방문한 뒤로는 좀더 이국적인 주제도 다루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자란 들라크루아는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와 그의 친구들인 영국 화가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와 엑토르 베를리오즈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한 낭만파 운동의 투쟁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첫번째 걸작인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Dante and Virgil in Hell〉는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비애감은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연상시킨다.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이 투르크인들에게 대량으로 학살당한 그당시의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키오스 섬의 학살 The Massacre at Chios〉이라는 대작을 완성, 182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
여기에는 정복자들의 오만한 자부심, 죄없는 그리스인들의 절망과 공포, 드넓은 하늘의 광채 등이 풍부한 표현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1830년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그가 낭만주의 화풍으로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결국 낭만주의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The Death of Sardanapalus〉에서 나타났던 현란한 색채, 〈리에주 주교의 암살 The Assassination of the Bishop of Li?ge〉에서 보여주었던 대학살의 혼란, 겉만 지나치게 화려한 역사의 잡동사니 등 초기 작품의 특징들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의 취향인, 세부 묘사나 극적인 표현의 문학적 서술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으며 내면을 고양시켜 주는 원천인 리얼리티를 대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835~61년까지 그는 수많은 대형 벽화를 제작했다. 부르봉 궁전에서는 알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위의 벽과 천장에 우의적인 그림을 그렸고, 도서실 천장에는 2점의 반원형 그림과 20점의 펜던티브 그림을 그렸다(1847).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로 전시실에 중앙 천장화를 그렸고(1851), 파리 시청(1871년에 화재로 소실)에 있는 평화의 방에는 천장화와 8점의 패널화 및 팀파눔에 11점의 그림을 그렸다(1849 시작).
생쉴피스 교회의 성천사 예배당의 천장에 성 미카엘을 그렸고,벽에는 야곱과 천사 및 헬리오도루스를 프레스코로 그렸다(1861).
그는 작품에 무리하게 몰두하여 건강을 해쳤다. 게다가 1849년경에 그는 가장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는데, 1844년에는 조카가 미국의 뉴욕 시에서 죽었고, 1845년에는 형인 샤를 들라크루아 장군이 죽었으며 1849년에는 그와 절친했던 쇼팽이 죽었다. 그후 그는 오로지 상상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데만 전념했다.
그가 죽은 뒤 파리 퓌르스텐베르 광장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그를 기념하는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http://blog.daum.net/yonghwan6158/4435 (들라크루아 작품이 많이 있음)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출생 1898. 2. 10,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956. 8. 14, 베를린
많은 양식과 수사법을 능숙하게 구사한 뛰어난 시인이자, 연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뛰어난 서사극을 쓴 극작가로,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베를린에서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를 발표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했으며, 주로 덴마크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의 책이 불태워지고 시민권이 취소되었으며 독일 연극계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되었다.
1949년 베를린 앙상블이 공연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의 한 장면,
무대 설계도 브레히트가 직접 담당했다
연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서사극은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의학을 공부하고(1917~21), 군 병원에서 복무하면서(1918) 1924년까지 바이에른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첫 희곡 〈바알 신 Baal〉(1923 공연)과 첫 성공작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 클라이스트 문학상 수상), 시와 노래 모음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7), 최초의 본격 희곡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924) 등이 나왔으며, 베데킨트·랭보·비용·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을 숭배했다.
이 시기에 또한 반부르주아적 태도가 격렬해졌는데, 이런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무너져버린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그 세대의 깊은 실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 중에는 조롱과 인습타파적인 풍자를 통해 부르주아 예술의 잘못된 표준이라 여긴 것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다다이즘 운동의 일원들도 있었다.
1920년대 후반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원리를 가르쳐준 사람은 제국의회의 공산당원이었다가 1926년 독일 공산당에서 쫓겨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카를 코르슈였다.
베를린에서는(1924~33) 잠시 막스 라인하르트 감독과 에르빈 피스카토르 감독을 위해 일하기도 했으나 주로 자신의 동인들과 함께 일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성공을 거둔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와 〈마하고니 시(市)의 흥망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1930)을 썼다. 또한 자신이 '교훈극'(Lehrstücke)이라고 부른 정통 연극의 테두리 밖에서 상연하기 위한 매우 교훈적인 작품들을 썼는데, 후에 바일, 힌데미트, 한스 아이슬러가 이 작품들에 곡을 붙였다.
이 시절 자신의 '서사극' 이론과 부정형 운문으로 된 간결한 형식들을 발전시켰으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33년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했으며(1933~41), 주로 덴마크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1941~47)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의 책이 불태워지고 시민권이 취소되었으며 독일 연극계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37~41년에 대부분의 위대한 희곡을 비롯하여, 주요 이론적 평론과 대담, 그리고 〈스벤보르거 시집 Svendborger Gedichte〉(1939)으로 출판된 많은 시들을 썼다.
이 시기의 희곡 작품들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출을 통해서도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30년전쟁을 배경으로 한 사극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갈릴레이의 생애 Leben des Galilei〉(1943), 전쟁 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비유극 〈세추안의 선인 Der gute Mensch von Sezuan〉(1943), 전쟁 전의 시카고를 무대로 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비유한 희곡 〈저지할 수 없는 아르투로 우이의 득세 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1957), 취했을 때는 관대하지만 술이 깨면 냉혹해지는 한 핀란드 농부를 그린 통속극 〈푼틸라 씨와 하인 마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8), 아이를 버린 명문 출신 생모와 그 아이를 돌봐준 하녀가 서로 아이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이야기인 〈코카사스의 백묵원 The Caucasian Chalk Circle〉(1948년 영어로 초연, 1949년 독일어로 된 〈Der kaukasische Kreidekreis〉가 나옴) 등이다.
브레히트는 반(反)국가활동 위원회의 출두명령을 받아 증언해야 했고 그후 1947년 마침내 미국을 떠났다(다이스 위원회). 취리히에서 1년을 보내면서 횔덜린의 소포클레스 번역을 채택한 〈안티고네 모델 1948 AntigoneModell 1948〉(1948 공연)과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Kleines Organon für das Theater〉(1949)를 썼다.
이 지침서에 나타난 그의 극이론의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이론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로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반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드라마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미학). 그 이유는 만약 관객이 실제로 오이디푸스, 리어 왕, 햄릿과 같은 과거의 영웅들의 감정이 그들 자신의 감정과 똑같다고 느낀다면, 인간 본성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저절로 무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존재를 믿게 한다거나 그 인물들과 동화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서사시인들이 쓰는 기법과 같은 방법을 따르도록 해야 하고, 그 방법을 통해 관객은 그가 무대 위에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사적'(이야기체·비[非]극적) 연극은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환상이 아니라 인간 행동을 과학적 정신으로 제시해주는 것이고, 연극은 연극일 뿐 실제 현실이 아님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여러 고안 장치를 통하여 얻어지는 거리감과 소외(疏外) 효과(Verfremdungseffekt)에 바탕을 둔다.
1949년 브레히트는 소련 점령구역에 있는 라인하르트 독일 극장에서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부인과 함께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부인 헬레네 바이겔은 이 연극의 주역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브레히트는 자신의 극단인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했고, 영구히 베를린에 정착하여 그때부터 앙상블과 자기 작품의 무대 공연에 전념하게 되었다. 종종 동유럽에서는 비정통적 미학이론 때문에 의심을 받았고 서유럽에서는 공산주의적 견해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거나 배척당했지만, 1955년 파리 국립극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인 1956년 동베를린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브레히트는 우선 많은 양식과 서법(敍法)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극작가로서는 아주 강도 높은 연구자로, 잠시 떠오른 착상이라도 끊임없이 엮어갔는데 이러한 그의 착상은 항상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푼짜리 오페라〉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에, 〈에드워드 2세〉는 말로의 〈에드워드 2세〉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냉소적인 유머와 아울러 드물게 음악적·시각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동적인 성격을 창조한다거나 극에 긴장과 구체적 형식을 부여하는 데는 종종 실패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밝고 분명하고, 단단하게 짜여진 서사적 구성을 좋아했으며, 독일 연극을 그 본성에 반하여 소극적으로 연기하게 한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이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결점에서도 원칙들을 이끌어낸 이론가였다.
http://cafe.daum.net/bookalley/7ig/5?q=%C0%CC%C1%DF%C0%CE%B0%DD%20Dvoynik&re=1
도스또예프스키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Dostoevsky라고도 씀. 1821. 11. 11(구력 10. 30) 러시아 모스크바~1881. 2. 9(구력 1. 28)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소설가·언론인.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의 형제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젊은시절과 문학수업 아버지는 퇴역한 군의관으로 가정문제에 엄격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불안정한 중산계층 출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일컬어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했다. 그의 문학적 관심을 일깨운 환경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젠트리 출신의 이반 투르게네프 및 레프 톨스토이의 환경과는 전혀 달랐다. 모스크바의 기숙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그는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군사훈련과 축성술 수업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 문학을 비롯한 유럽문학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 읽은 감상적인 통속소설은 폭력과 범죄를 다루는 그의 취향을 부추겼다. 이 형성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는 밤이 되면 동료 사관생도들과 함께 밖에 나가 맛있는 음식과 술, 재미있는 대화 및 음악과 연극을 즐기고 여자들을 사귀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명성과 자기희생적인 행위 및 이상주의적인 우정을 열렬히 꿈꾸었다. 공병학교를 졸업한 얼마 뒤 오로지 글 쓰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과감히 전역했으나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는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Bednyye lyudi〉(1846)의 원고를 완성해놓았던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통해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이 원고를 보냈다. 벨린스키는 이 무명의 청년 작가를 불러 주인공의 숨겨진 본성을 밝히는 예술적 재능을 칭찬해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기쁨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은 예술가인 당신한테 고지되고 선언되었소.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오. 그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충실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오!"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노력을 기울인 작품도 아니고 초심자의 기술적 결함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벨린스키의 칭찬은 예언적인 통찰이었다. 벨린스키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고아 소녀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감추고, 그 애정을 감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서 존경을 얻으려고 애쓰는 가난하고 늙은 관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 당시의 처참한 사회 상황에 희생된 사람들의 희망과 노력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주제를 다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솜씨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는 종래의 방식에 새로운 차원(주인공의 갈등을 내면에서 관찰하는 심리분석적 관심)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접근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종합이 아니라 분석으로 글을 써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깊숙한 곳으로 뚫고 들어가며, 모든 원자를 분석하면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의 독자적인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반면에 그는 문단과 사교계에서는 인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하지 못했다. 그가 첫번째 성공을 거둔 이후, 문단과 사교계는 그를 명사로 대접하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키가 작달막하고 금발에 작은 회색 눈, 병색이 완연한 얼굴,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리는 입술을 가진 그는 그런 사교 무대에서는 침착성을 잃고 어색한 몸짓을 보였다. 그는 창작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2번째 중편소설인 〈이중인격 Dvoynik〉(1846)을 발표했다. '분열된 자아'(주인공인 하급 관리 골랴트킨은 날로 심해지는 피해 망상으로 고통을 받다가, 그를 없애려는 음모자이며 그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인물을 만나게 됨)를 탐구한 이 작품은 독자들을 지루하게 했고, 그는 벨린스키의 비평적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덜 분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열된 자아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이중인격자'는 그후 발표된 그의 여러 걸작 장편소설의 주인공들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846~49년에 그는 몇몇 소품과 단편소설 및 중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했지만,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가 야심적으로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Netochka Nezvanova〉(1849)가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자들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의붓아버지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그의 후기작품에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개념과 이미지 및 장치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그러나 그가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이 소설은 3편의 긴 삽화만 발표된 채 중단되었고, 그의 문학 제1기도 막을 내렸다. 처음에 발표된 이 3편의 이야기들은 그가 받은 문학적 영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생활에 대한 그의 관찰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해부하는 진지한 분석은 자신의 심리와 정신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방식이기는 했지만, 이 문학 제1기는 그의 창조적 발전이 앞으로 나아가게 될 주요 방향을 암시해 준다. 시베리아 유형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억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여, 이상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토론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소책자를 불법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소규모 비밀결사에도 참석했다. 서유럽을 휩쓴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1849년 4월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오랜 수사가 끝난 뒤 체포당한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말 극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의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리고, 황제 폐하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황제의 사면령이 발표되기 직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처형에 대비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후기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형선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중죄를 범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당연한 죄값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일반 죄수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정신적 고통에 짓눌렸고, 이 무렵에 첫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간질병은 그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유형지에서 그에게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이 책은 1825년 12월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이른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 한 사람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신약성서〉는 유형지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배웠다. 죄인을 일으켜 주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감옥생활은 그가 장차 작가이자 사상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젊은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는 1854년에 석방된 뒤 시베리아의 세미팔라틴스크라는 도시에서 병졸로 복무하게 되었지만, 군인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형생활보다 더 지루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여 결국 하급 장교가 되었고, 친구도 몇 명 사귀었으며, 유형생활 동안 책을 읽지 못해 생긴 공백을 벌충하기 위해 책과 정기간행물을 보내 달라고 형에게 거듭 간청하곤 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857년에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와 결혼한 일이다. 결핵 환자인 이 과부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으로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지게 되자, 지난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나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유형생활중에 생각해둔 다양한 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익살스러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숙부의 꿈 Dyadyushkin Son〉(1859)은 세미팔라틴스크를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한 한 지방도시의 위선적인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그보다 앞서 활동한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창작 방법을 따르고 있다. 뒤이어 좀더 야심적인 중편소설 〈스테판치코보 마을과 주민들 Selo Stepanchikovo i ego obitateli〉(1859)이 발표되었는데, 비록 예술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지만, 이중인격자인 주인공 오피스킨에 대한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졸작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2편의 작품을 발표한 직후, 그는 쇠사슬에 묶여 유형을 떠난 지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그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문학적 부활 러시아 수도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를 정치범으로 찬미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그들과 그들의 사상, 특히 종교를 비웃는 그들의 태도를 경멸했다. 그는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옹호하는 사회개혁에 공감했다. 그의 첫번째 작품집은 1860년에 나왔고, 이듬해 그는 형의 협력을 얻어 〈브레먀 Vremya〉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가 주창한 입장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양대 지식인 그룹의 이념적 화해였으며,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파벌이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논설과 소설을 통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민중의 참된 접근방식을 모색했으며, 그 덕분에 잡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인인 아폴론 마이코프와 비평가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및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등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의 정치적·사회적·예술적 견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집의 기록 Zapiski iz myortvogo doma〉(1861~62)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누렸던 문학적 명성을 되살려 주었다. 투르게네프가 갈채를 보냈고,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 걸작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소설은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유형지에서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유형생활을 묘사하고 특별한 죄수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한편, 감동적인 삽화를 통하여 이 버림받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거의 같은 무렵, 그는 〈브레먀〉에 〈학대받는 사람들 Unizhennye i oskorblyonnye〉(1861)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가족과 인습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사랑을 바친 여자의 권리를 다룬 이 소설은 비평가들을 괴롭혔지만, 독자 대중은 무척 기뻐했다. 적어도 몇 개의 초상들, 예를 들면 그가 처음으로 완전히 묘사한 전형적인 이중 정서의 여성인 주인공 나타샤, 어린이의 심리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하는 어린 넬리, 그리고 고집불통인 악당 발코프스키 등은 그의 주요 소설에 등장할 더욱 인상적인 등장인물의 선구자이다. 1862년 여름에 이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브레먀〉로 벌어들인 돈으로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외국 여행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여행에 자극받아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기록 Zimniye zametki o letnikh vpechatleniyakh〉(1863)이라는 유명한 기사를 통해 여행에서 관찰한 유럽 문명의 악덕 때문에 러시아의 고귀한 운명에 대한 그의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해에 정부는 〈브레먀〉에 실린 어떤 기사를 스트라호프가 쓴 비애국적인 기사라고 생각하여 〈브레먀〉를 폐간했다. 이 위기가 닥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빌려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지병인 간질 치료가 겉으로 내세운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행운을 시험하고, 〈브레먀〉의 기고자이자 이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폴리나 수슬로바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도박과 밀회에서 그의 운은 형편없었지만, 수슬로바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게 될 이른바 '악마 같은 여인들'을 구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국으로 돌아온 뒤, 약간의 유산을 받아 형과 함께 〈에포하 Epokha〉라는 잡지를 다시 창간했으며, 이 잡지 창간호에 〈지하 생활자의 수기 Zapiski iz podpolya〉(1864) 제1부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합리적인 이기주의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을 풍자한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상대적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소외된 개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중성은 의지와 이성의 근본적인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기성찰을 강조하고, 이 자기성찰은 참고 견딜 만한 현실 세계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의 정신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 묘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접근방식이 달라진 것을 보여 준다. 본질적으로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앞으로 그가 쓸 걸작들에 대한 철학적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종교적·정치적·사회적 사상과 관련된 걸작 장편소설들의 중심 개념이 이 작품에 거의 모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걸작 장편소설 창작기 1864~65년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불행이 잇따른 시기였다. 아내와 형이 죽었으며, 잡지는 빚더미에 짓눌려 도산했다. 채무자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이자 그는 수상쩍은 출판업자한테 소설 고료를 선불받아 외국으로 도망쳤다. 이미 상습적인 도박꾼이 되어버린 그는 이번에도 역시 도박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몇 여자와 연애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외국에서 폴리나 수슬로바를 다시 만났는데 아마 수슬로바와 결혼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슬로바는 비스바덴에서 그를 버리고 떠났고, 그는 룰렛에서 가진 돈을 몽땅 잃고 옷을 저당잡힐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밀린 숙박비와 모국으로 돌아갈 경비를 빌려 달라고 친구들에게 애원했다. 한 잡지 편집장한테는 〈죄와 벌〉이라는 또 다른 소설을 써줄 테니 선금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돈이 도착했고, 그는 1865년 10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가 〈죄와 벌〉(1866)을 처음 구상한 것은 아마 유형지에 갇혀 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상을 적어 놓은 수많은 작가 노트(그는 그후에도 소설을 쓸 때면 노트에 구상을 적어두곤 했는데, 이 작가 노트들은 그의 창작방법 및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에는 그가 이 작품의 예술적 세부에 기울인 끝없는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돈을 기본 문제로 삼고 있는 사회소설이다. 이 작품의 가난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한 급진적 젊은이들의 유물론 사상이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에 반항하는 지식인 허무주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그에게는 이성이 삶의 과정을 대신한다. 인도주의적 목적은 사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의 파괴주의적 이론은 결국 그를 살인으로 몰고간다. 감옥에 갇히자 그는 도덕률을 위반하도록 자신을 충동질한 지적 오만을 버리고, 행복은 이성에 바탕을 둔 실존 계획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고통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아내, 창녀 소냐,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 같은 보조 등장인물들도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살인을 다룬 흔해빠진 추리소설 속에 주목할 만한 철학적·종교적·사회적 요소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평범한 추리소설적 긴장감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었으며, 발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혁신적 기법과 강렬한 문체, 그리고 범죄자와 도덕적 불구자들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밝혀주는 영적 광휘가 독자와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완성하기 전에 악덕 출판업자와 이미 맺은 계약을 1개월 안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가혹한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안나 스니트키나라는 젊은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중편소설 1편을 기일 안에 끝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도박사 Igrok〉(1866)는 거의 힘들이지 않고 쓴 작품이지만, 도박에 대한 열정과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애증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힘찬 장면들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듬해 그는 이 속기사와 결혼했고, 빚쟁이와 돈을 요구하는 인척들을 피해 아내와 외국으로 가 4년 동안 머물렀다. 두 사람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때로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아내는 이 모든 고난과 남편의 간질 발작, 끊임없는 노름, 그리고 첫 아이의 죽음을 꿋꿋이 견뎌냈으며 남편과 남편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 2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2번째 걸작 〈백치〉(1868~69)는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러시아 신문에 보도된 어떤 형사재판 사건 기사였다. 이런 사건들을 그는 '환상적인 사실주의'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소설에 이용할 때는 외부세계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그는 평범한 러시아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 내부의 인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들을 한 차원 끌어올려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그는 조카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치〉의 주요의도는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즉 도덕적인 의미에서)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은 오직 한사람뿐이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은 주인공 미슈킨의 순수한 도덕적 성정을 손상시키고, 예판친 집안과 이볼긴 집안, 로고진 그리고 미슈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투는 유별난 경쟁자 아글라야 및 나스타샤와 그의 관계를 좌우한다. 이 작품에서 이들을 비롯하여 관능·탐욕·범죄에 굴복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미슈킨의 도덕적 신념을 시험하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다. 이들은 그의 신념과 밝은 성격에 이끌리지만 봉사와 동정심 및 우애를 외치는 그의 계시는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의 체험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 틈에서 겪었던 체험을 상징한다. 결국 그가 자신의 선량함으로 감동시킨 죄인들은 불행해지고 그 자신은 백치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한 자도 쓰지 않은 장편소설 원고료를 선불받아 이미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단편소설을 중편소설로 개작하여 다른 출판업자한테서 현금을 받았다. 이 중편소설이 바로 아내를 유혹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꾸는 배신당한 남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영원한 남편 Vechny muzh〉(1870)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예술에서는 특별히 발전한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장편 연작을 쓰겠다는 방대한 계획에 몰두해 있었다. 이 연작의 초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에게 몹쓸 죄를 저질렀으나 정신적 순례를 끝낸 뒤 죄를 씻고 구원을 얻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이 연작은 끝내 씌어지지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쓴 3편의 장편소설은 이 작품의 개요에서 사상과 장면 및 등장인물을 빌려온 것이다. 그는 이 3편 가운데 첫번째인 〈악령〉을 1869년 쓰기 시작해 1872년에 끝냈다. 〈악령〉의 주요 줄거리는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배신자로 의심받아 동료 혁명가들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선정적인 신문 기사를 계기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줄거리에 당시 구상하고 있던 〈위대한 죄인의 생애〉의 특징과 인물을 집어넣었는데, 특히 〈악령〉의 중심인물인 스타브로긴의 면모에 그런 특징이 잘 스며들어 있다. 행동과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소설에서 그는 혁명 음모가들을 바보와 악당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들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개심한 샤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사상을 반영한다. 이런 반혁명적 태도는 제정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민족주의적 신념을 표현하며, 이 신념은 러시아 정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악령〉을 지배하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 스타브로긴이다. 그의 매력적인 성격은 반역적 급진주의자인 샤토프와 키릴로프뿐만 아니라 흥미있는 자유주의자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노인과 혁명가인 그의 아들 표트르에게도 영향을 주며, 주요한 여자 등장인물인 리자베타와 다리야 및 마리야는 그에게 운명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자 그의 본성인 타고난 선량함은 위축되어버린다. 그가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것은 그가 악에 완전히 굴복한 것을 상징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훈적인 의도로 이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이 과장된 목적소설이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이 갖고 있는 힘 덕분이다. 그는 선정적인 요소와 이념적인 요소를 결합시키기 좋아하지만, 이 작품만큼 뛰어난 예술기법으로 이 요소들을 결합시킨 작품은 드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을 끝내기 오래 전에 병에 걸렸고 돈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지만, 외국에서는 소설을 끝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걱정이 된 출판업자는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보내주었다. 이 작품이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한 것은 인상적인 그의 작품 선집 덕분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시 사교모임에 초대받기 시작했다. 1873년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수적 주간지 〈그라주다닌 Grazhdanin〉의 편집장이 될 수 있었다. 1년 뒤, 그는 맡은 일이 너무 제한되어 있고 발행인이 지나치게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냈다. 이무렵에는 이미 유능한 아내가 그의 저작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1876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라주다닌〉지에 기고했던 〈작가일기 Dnevnik pisatelya〉라는 칼럼을 별개의 월간지로 분리했다. 그는 이 간행물을 1년 이상이나 발간했고 1880년과 1881년에도 몇 권을 추가로 발간했다. 이 잡지는 주로 당시의 주요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와 문학적 회고담 및 비평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소품과 단편소설도 이따금 실었는데, 이 가운데 〈온화한 정신 Krotkaya〉(1876)·〈우스운 인간의 꿈 Son smeshnogo cheloveka〉(1877)은 그의 최고 걸작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이 잡지를 광범위한 사회·정치·종교 문제에 대한 그의 놀라운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언론과 문학은 그의 마음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과 현실의 상호관계는 일상적인 실존을 관찰한 결과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일기〉는 수많은 독자를 끌어모았고 그의 생활과 철학 및 소설, 특히 마지막 2편의 장편소설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작가일기〉에서 그는 〈미성년 Podrostok〉(1875)의 주제를 밝히고 있다. 〈미성년〉은 사생아로 태어난 아르카디 돌고루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쓰면서 겪은 모험을 고백한 소설이다. 베르실로프는 한 사람의 이중인격자로서 러시아인은 독특한 민족이고 완전한 세계주의자이며, 유럽 지식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혁명적 유물론을 신봉하기 때문에 이제 곧 파멸할 운명에 있다는 작가의 확신을 대변해준다. 그는 베르실로프의 이중성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이중성을 성찰하여 이중성을 결정하는 심리적 요인들을 관찰하고, 그가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남녀의 생각과 감정 및 행동에 이 심리적 요인들을 반영했다. 그는 몇 개의 곁가지 줄거리 때문에 중심 줄거리가 묻혀 버린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성년〉 속에는 4편의 장편소설이 있소." 비평가들은 대개 이 소설을 그의 다른 작품보다 낮게 평가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80)를 집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성은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저명인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는 저명한 편집자이자 작가인 네크라소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문학부 준회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880년에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추모제에서 행한 연설은 러시아의 세계적 소명을 힘차고 분명하게 예언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휴양지 스타라야루사에서 아내와 두 아이 표도르와 류보프와 함께 조용히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곳에서 그는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글을 쓰는 엄격한 요양법을 지켰으며, 헌신적인 아내는 그가 구술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속기로 받아썼다. 그가 창작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준비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 살해에 대한 이야기로 심오한 심리적·정신적 암시로 애증의 갈등을 도입하면서 아버지 살해과정을 냉혹하게 전개해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믿음과 신에 대한 추구이며,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중심 사상이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알료샤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삶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삶 자체를 사랑한다. 드미트리 역시 삶을 사랑하지만 그 의미는 찾지 못한다. 삶 자체보다 삶의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이반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며, 창조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이 형상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반의 이중성은 인간과 신의 끝없는 투쟁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반역행위로 시작하여 신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반란으로 끝을 맺는다.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신앙을 추구하게 된 동기였던 이른바 저주받은 문제들, 죄와 고통 그리고 이것들과 신의 존재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반이 신의 세계를 거부하는 것은 유명한 〈대심문관의 전설〉에 밀도있게 극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소설의 다음 장에서 우주의 조화라는 비밀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감정 그리고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 속에 제시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의 속편에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끝낸 지 몇 달 뒤인 1881년 2월 9일(구력 1. 28)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널리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손꼽히는데, 그 까닭은 아마 그가 소설 속에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대 및 전후세대를 괴롭힌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극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고, 나치 지배 이전의 한 독일 비평가는 마르틴 루터 다음으로 독일에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말했다. 20세기 프랑스의 경우,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세대의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으며,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은 이성의 횡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난에서 영감을 얻었노라고 말했다. 레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해 "나는 그런 쓰레기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소련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유명한 소련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이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독자들의 체험을 변형시키는 능력이 작가의 위대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20세기 미국 소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소설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회의라는 질병에 허덕이며 신음하는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영웅적 주인공들로부터 창조된 형상이기 때문이다. E. J. Simmons 글 | 金碩禧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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