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치 - 전쟁고아를 통해 본 참상, 파괴 속에서도 살아남는 인간애 그리고 고발을 그린 수작

무거운 빈가방 2019. 1. 28. 01:26


더 서치(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

 

<더 서치>에 대한 기본적 해설

  아티스트로 제84회 아카데미 5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던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신작 더 서치는 전쟁 중 군인들에게 가족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어린 동생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에 말을 하지 않게 된 아홉 살 소년 하지가 EU의 인권 담당 캬홀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용기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휴먼 드라마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충격에 빠진 아홉 살 소년과 미군의 이야기를 담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수색’(1948)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제2차 체첸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아티스트’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베레니스 베조와 러브 어페어’ ‘우리의 20세기아네트 베닝이 주연을 맡아 여성 캐릭터가 이끌어가는 영화에 깊이를 더했다.

    

  

<더 서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비디오로 쓰레기 같은 체첸에서 촬영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의 부모가 학살당하는 장면이며 촬영자는 내내 즐거운 목소리로 상황을 즐긴다.

 

<더 서치>는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8살 아이가 생존을 위해 피난을 가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를 담고 있다.

말문을 닫아 버린 하지

하지를 찾아다니는 누나

체첸의 참상을 녹취하고 유엔에 보고하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하는 카홀

난민대피소에서 아이들에게 삶을 되찾아주려는 헬렌

 

이들의 이야기가 하지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러시아 군인 콜리아의 행동과 시선은 <더 서치>의 다른 중요한 축이다.

감독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을 펼치면서 이들의 관계를 하나씩 엮어 내면서 체첸 전쟁의 실상과 비참함 그리고 짐승과 지옥의 모습을 펼쳐낸다.

카메라는 여러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펼치지만 복잡하지 않고 군인의 변화와 하지의 변화는 전혀 다를 듯하지만 연결이 매끄럽다.

 

대마초를 피우다 경찰에 잡혀간 콜리아는 징역 대신 군대를 택한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군대에서 나름 정의롭거나 순수해 보이는 콜리아는 국가와 군대의 폭압 속에서 점점 변해 간다.

전쟁 또는 군대가 세상과 사람들을 파괴해 가는 과정에 콜리아가 있다.

 

여기에 비해 하지’ - ‘하지의 누나’ - ‘카홀’ - ‘헬렌의 축은 자신이 처한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자존과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강한 연대의 축이다.

특히 하지카홀의 만남에서 서로가 변해가는 과정과 헬렌이 보여주는 아이들에 대한 희망과 따뜻한 시선은 잠시도 긴장을 놓치지 못하게 하는 전쟁마저도 훈훈하게 녹혀 버릴 정도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모아지듯 이 고발성 영화는 전쟁을 막진 못한다.

카홀이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여하여 연설하는 장면은 그것을 대변한다. ‘인권위원회란 곳이 도데체 뭐하는 곳인지? 국가 간의 힘이 통하는 곳에서는 선언적 구호나 문장은 별 소용이 없다.

전쟁은 세상을 파괴시키고 지옥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희망임을 <더 서치>는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 어린 하지가 간난아이 동생을 데리고 도망다니다 남의 집앞에 버리고 가는 장면은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임권택 1984)에서 어린 수지(유지인)가 수인(이미숙)을 버리고 도망가는 장면이 더올랐다.


** 하지는 카홀의 따뜻함에 대한 보답으로 보석을 훔친다. 카홀의 목걸이가 자신 것임을 안 난민 가족은 항의를 하고 카홀은 교육적(?) 차원에서 이 가족들을 하지에게 데리고가서 하지가 사과하겠끔한다.

 난민 가족은 ' 당신이 더난 뒤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느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라'

 하지는 ' 어차피 죽고 러시아 군에게 다 빼앗길 것인데 차라리 우리가 더 뜻있게 쓸 수 있지 않느냐!'

 아이의 눈엔 떠날 카홀은 살지만 자기들이 속한 체첸민간인은 부모처럼 다 죽는다라 각인되어 잇는 모양이고, 혹 감독은 끝나지 않은 체첸이란 국가에  대한 불투명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말 일듯하다.

 전쟁은 모두에게 희망을 빼앗는 인류의 가장 무섭고도 거대한 질병이다.

 

*** 러시아는 체첸 전쟁 때문에 군인 충족을 위해 견찰을 풀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젊은이는 모두 잡아 가두고 반강제로 군대는 보내는 일을 한 모양이다.


**** '체첸'에서의 참상은 상상 이상이다. 러시아군은 그들이 내키면 마음대로 살인을 한다.

      불타는 고층건물 앞에서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나누는 대화와 전우의 시신에서도 모든 것을 탈취하는 러시아군의 모습은 잔인과 처참을 동시에 보여준다.


***** 전쟁속에서도 체첸 사람들의 끈끈한 가족애는 남다르다. 내 피붙이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모두가 가족이라는 생각들을 가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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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135min | D-Cinema | color | France | 2014 |

감독 미셀 라자나비시우스(Michel Hazanavicius)

배우 베레니시 베조, 아네트 베닝, 압둘 칼림 마마츠예프

 

(영화의 전당 홈피 해설)

6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

 

전쟁으로 눈앞에서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아홉 살 소년, ‘하지(압둘-칼림 마마츠예프).’ 18개월이 된 동생을 감당할 수 없어 이웃집 문 앞에 버리고 마을에서 달아나 피난민 무리에 합류한다. 난민 대피소에서 헬렌(아네트 베닝)’을 만나지만 죄책감과 상처 때문에 말을 하지 않던 하지는 동생을 찾기 위해 그곳을 도망쳐 나오고, 우연히 전쟁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EU 인권활동가 캬홀(베레니스 베조)’을 만난다. 하지만 굳게 마음을 닫은 하지는 그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는데하지의 커다란 용기와 조그마한 목소리에 담긴 그날의 진실은 과연 기억될 수 있을까?

 

[ DIRECTOR Interview -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

 

Q. <더 서치>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프로젝트에 뛰어든 이유는?

 

A.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프로젝트인데, 항상 너무 어려워 보였다. 아카데미를 받지 못했다면 아마 예산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서치>는 시장의 변두리에 있는 영화이자 달성 가능한 영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영화다. 감독으로서 바로 그런 자리에 서 있고 싶었다.

 

Q. 2차 체첸 전쟁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2004년에 라파엘 글럭스만, 다비드 하잔, 피에르 메제레트와 다큐멘터리 <르완다: 대학살의 역사> 각본을 공동 집필하고 제작했다. 라파엘은 체첸에서 일어난 일들을 대중에게 알리려 했던 정말 몇 안되는 프랑스 지식인 앙드레 글럭스만의 아들이다. 이를 계기로 체첸의 상황을 인지하게 됐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조상님들의 후손인 나에게 <더 서치>는 당시의 이야기를 에둘러 표현할 길을 열어줬다. 학살 생존자인 르완다 친구가 국경 없는 의사회에 소속된 친구의 이메일을 보여줬다. 그 메일의 마지막 문장이 큰 충격을 주었다. “다큐멘터리보다 이야기가 있는 진짜 영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람들도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탄식할 겁니다. ” 그의 말을 마음 깊이 간직하게 됐다. 체첸 공화국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체첸인은 다 테러리스트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반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영화를 구상하고 있을 때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1948년에 만든 영화 <수색(The Search)>을 니콜라 사다가 보여줬다. <수색>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어린 소년이 폐허가 된 베를린에서 한 미군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년의 엄마는 아들을 찾아서 온 유럽을 뒤진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나니, 드라마로 풀어나가는 게 가장 좋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Q. 원작과 눈에 띄는 차이점도 보인다.

 

A. 한 가지 관점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체첸인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모든 러시아인을 체첸인 살인마처럼 묘사할 순 없었다. 하지만 체제가 사람들을 억눌러 살인마로 만들어 가는 과정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

 

Q. 조지아에서 영화를 촬영한 이유는?

 

A. 우크라이나 혁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오렌지>(2004)를 공동 제작했는데 라파엘 글럭스만 감독이 지금은 조지아에 정착했다. 그를 만나러 갔다가 조지아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체첸의 일반적인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온 세상이 폐허가 된 것 같은 그곳의 분위기나 색감이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만들어진 <3의 사나이>(1949), <외교 문제>(1948), <수색>(1948) 같은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이런 환경은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중요 요소가 될 것 같았다.

 

Q. 연출하며 어려웠던 점은?

 

A. 전쟁과 죽음, 폭력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점이 감독인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촬영 내내 날 밀어붙이려고 한 것 같다. 내가 알기로 체첸 전쟁을 이렇게 큰 규모로 다룬 영화는 <더 서치>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건 한 민족의 역사 한 토막을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이었다. 내가 그 민족 사람이 아니라서 더 큰 책무를 느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역사를 정확히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압박감이 컸다.

 

Q. 구체적으로 더 설명해줄 수 있나?

 

A. 가장 큰 어려움은 영화의 허구적인 면과 날것 그대로의 리얼리즘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촬영하고, 아마추어 배우를 쓰고, 모든 인물이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기술적인 면에선 거칠면서도 디테일한 이미지와 얼굴의 윤곽선, 촬영 장소의 밀도와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진짜 영화다운 영상을 연출하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체첸 전쟁에 관한 이미지도 녹여내고 싶었다. CG를 쓰기보단 현지에서 촬영하기로 처음부터 확정했다. 한편 세트 인테리어를 꾸밀 땐 나 영화예요, 예쁘죠라고 말하는 것 같은 소품이나 지나친 조명, 너무 상투적인 세트, 과하게 복잡한 헤어스타일, 짙은 화장은 피하라고 각 부서 책임자들에게 주문했다. 영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얻으려고 테스트를 정말 많이 했다. 귀욤 시프먼과 난 테스트 과정에서 거친 질감을 내려고 필름을 현상할 때 블리치 바이패스라는 기법(귀욤이 1996년 작품 <버니>에서 사용했던)을 썼다. 아주 정밀한 조명 작업이 필요한 기법이다. ‘조명을 안 쓴 것 같은효과를 내려면 역설적으로 힘이 배로 든다. 귀욤과 함께하는 네 번째 작업이라 작업하기 쉬웠고, 결국 귀욤은 언제나처럼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화면의 재단과 구도, 카메라 움직임은 나만의 원칙을 고수했다. 너무 뻔한 움직임은 최대한 줄이고, 핸드헬드로 거의 모든 장면을 촬영했다. A라는 인물을 촬영하던 촬영 기사가 몸을 빙글 돌려 B라는 인물을 촬영하는 것 같은느낌을 주려고 카메라 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한 장면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손이 더 많이 가는 한이있더라도 아주 단순해 보이는 세트만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서 공습 장면은 시퀀스 샷인데, 클래식한 전쟁 장면보다 스펙터클한 맛은 떨어지지만, 인물을 더 가까이에서 담아낼 수 있었다. 어쨌든 그게 내가 내고 싶었던 효과였다.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연출하기는 쉽지 않다.

 

Q. <더 서치>는 러시아 군인들이 한 체첸 가족을 처형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A. 맞다. 난 영화에서 잔혹한 죽음을 진지하게묘사하는 것을 원래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언젠가는 그 공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건드려봐야 한다. 한 번으로 충분한데, 그 한 번이 정말 중요하다. 핸드헬드로 찍어 영화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거칠고 선명하지 않은 영상. 이런 시각적 연출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나였고, 5분에 걸친 시퀀스 샷이었다. 암흑 속에서 누군가 젠장! 카메라 왜 작동을 안해?”라고 외치며 시작한다는 점이 맘에 든다. 난 이런 부정적 상황으로 영화의 막을 여는 것을 좋아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여러 번에 걸쳐 상기시키는 것도 좋아한다.

 

Q. <더 서치>는 장시간에 걸쳐 여러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갔는가?

 

A. 수학처럼 계산하되 지나치게 계산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각각의 이야기에 뚜렷한 일관성이 있어야 했다. 관객들에겐 논리가 필요하므로 이야기가 논리적이어야 하며,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어우러졌을 때 감정적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더 서치>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는 주제나 전개 면에서 상응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서 어린 소년의 삶의 궤적은 군인 청년의 궤적과 정반대다. 한 명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사회로 돌아오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하게 사회 활동을 하다가 죽음으로 내몰린다. 시각적으로 봤을 때도 하지는 돌무더기와 먼지로 가득한 폐허가 된 세상에서 더 깨끗한 세상으로 옮겨가고, 콜리아는 정반대로 혼돈과 파괴뿐인 세상으로 옮겨간다. 이처럼 여러 인물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이야기에선 중간에 큰 공백을 둬도 된다. 관객은 예전에 나왔던 인물을 다시 봤을 때 공백 동안 인물이 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여러 이야기의 관계 설정을 잘하는 것도 중요했다. 예를 들자면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갑자기 두 번째 이야기로 건너뛰면 안 된다. 청년 군인이 나오는 폭력적 장면에서 캬홀과 하지가 나오는 장면으로 전환하기란 쉽지 않았다. 누나 라리사의 사실적인 이야기가 두 이야기 사이에서 적절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Q. 복잡한 서사 구조에 증인들의 증언 장면까지 포함되었다.

 

A. 각본 작업을 할 때 <더 서치>의 핵심 주제는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증언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됐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지가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무엇이 위태로워질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말하는 사람에겐 어느 정도의 힘이 생긴다. <더 서치>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이런 힘을 지닌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을 모아 각색해서 배우들에게 재연하도록 했다. 그중 영화에 끝까지 남은 세 개의 증언이 이야기 전체에 신뢰성을 불어넣었다. 캬홀도 그런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처음 소개된다. 바로 캬홀이 3분에 걸쳐 어떤이의 증언을 듣는 장면이다. 캬홀이라는 인물의 핵심적 특징, 즉 캬홀은 사건 자체에 가담하는 참가자가 아니라기록자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확실히 하려고 그렇게 했다.

 

Q. 캬홀이 <수색>에서는 미군 병사(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같은 역할이다. 국제 단체에서 근무하는 캬홀로 변경된 이유는 무엇인가?

 

A.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치 활동에 전념하는 35세 여성이 아이를 입양하면 생활 방식이 180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캐릭터를 남자에서 여자로 바꾸면 더 강한 울림을 줄 거라고 판단했다. 또 다른 이유는 체첸에선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용감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다양한 대립 구조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러시아인/체첸인, 민간인/군인, 성인/아이, 그리고 남성/여성의 대립 구조 말이다. 또 이런 종류의 영화에선 종종 서사의 불균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불균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서구, 즉 미국의 이야기가 세계 각지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난 그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캬홀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보다 힘을 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Q. 캬홀과 하지의 관계는 미묘하다.

 

A. 캬홀과 하지의 관계를 통해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서양인들이 맡은 역할이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고, 무엇에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다. 하지는 캬홀과 같은 언어를 쓰지도 않고, 캬홀을 알지도 못한다. 캬홀은 감정적으로 누군가에게 헌신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나 연인에게나 마찬가지다. 오직 운동가로서 정치 활동을 하는 데에만 전념한다. 캬홀은 그런 활동이 피상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사람에게 헌신하기 시작하는데, 이 헌신은 이전과 다르게 지적이고 감정적이다.

 

Q. 콜리아가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 전우를 때려 놉히고 상급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장면엔 중요한 의미가 있다.

 

A. 사람들은 왜 이미 안 좋은 상황에서 최악으로 나아가게 되는 걸까? 남은 선택지가 다 나쁘면 생존 본능이 발동된다. 콜리아는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 믿으면서 최악을 선택한다. 수용소, 유배지, 군부대 같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기본 원칙은 다 똑같다. 사회적 가치가 있고 문명화된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다. 망설임은 버리고 모든 것을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곧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그처럼 긍정에서 부정으로 추락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렇지만 실제 병사들이 겪은 수치와 인간성 파괴는 영화에 다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시 증언을 들어 보면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다. ‘견디기 힘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영화적으로 아주 좋은 질문이다.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여야 하는 장면을 관객들이 견뎌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Q. 아네트 베닝은 난민이 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육원 원장 헬렌을 연기했다.

 

A. 아네트 베닝은 체첸과 조지아에 관한 조사를 엄청나게 했다. 촬영지에도 2주넘게 머물렀다. 아네트는 미국 좌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단순한 A급 여배우가 아니라 스타이기 때문에 헬렌이라는 인물이 맡은 역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헬렌에게 불어넣을 수 있었다.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아네트와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다.

 

Q. 영화의 결말에 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A. 선과 악이 무차별로 대립하는 이런 영화에선 모두 나름의 이유로 저마다의 여정을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는 선악 이분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힌다. 콜리아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설교하듯이 만들지 않으면서도 영화에 복잡한 맛을 더한다. 우리는 한 괴물의 탄생을 지켜보는 동시에 지금껏 한 인간의 여정을 뒤쫓아 왔음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다. 결말은 흑백으로 가를 수 없이 아이러니하다. 그렇지만 일말의 희망은 느껴진다. <더 서치>가 전하는 바는 살인마가 되는 길과 생존자가 되는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삶은 언제나 생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체첸 정쟁이 궁금해 검색해 보니 블로그에 올라있는 글이 있어서 주소를 같이 올린다.(사진은 올리지 못했다,.)


체첸전쟁과 러시아의 교훈 Military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kb9042&logNo=221064644071                                  

2017. 8. 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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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전차 무기는 매우 우수하며 신뢰성도 높습니다. 이것은 체첸인들이 아군의 전차와 장갑차를 상대로 입증한 믿을수 있는 정보입니다."

-러시아군 정비대대장 스미도노프 대위


그동안 공산진영의 대장이었던 소련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10월달에 취임한 조하르 두다예프 체첸 대통령은 독립을 선언하며, 비 체첸계 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체첸은 카스피 해의 대규모 석유단지와 러시아 본토까지 잇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때문에 신생 국가인 러시아 입장에서는 절대로 체첸을 포기할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러시아는 93년 잉구쉬 공화국과 체첸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킵니다.


또한 94년부터 비 체첸계 주민들과 체첸계 주민들관의 무장투쟁이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면서 두다예프의 실각을 꾀하였습니다.


94년 12월 체첸 내부상황이 악화되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직접 정규군을 투입하여 두다예프 대통령을 축출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체첸 사태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과거 구소련에서 체코,헝가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경험이 있었으며, 시민들은 전차가 나타나는것만으로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인지 러시아측에서는 예전처럼 기갑차량이 나타나기만 해도 독립시위가 가라앉을것이라고 생각하여, 시가전에 가장 필요한 보병을 충분히 동원하지도 않았으며, 충분한 병력투입을 하지않아 장갑차에 탑승인원이 없거나, 장교가 직접 차량을 운전하는 사태가(...)벌어졌습니다.

공격에 대한 방어도 제대로 하지않아, 기갑차량에 장착된 대다수의 반응장갑내부에 화약대신 벽돌이 들어가는등, 준비가 몹시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은 항상 그랬던것처럼 큰도로를 따라 천천히 전진해왔으며 그래도 시가전인지라 기계화보병을 차량측면에 배치시켜 사주감시를 맡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러시아와 생각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쉽게 해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로즈니를 사수하고 있었던 체첸군 병력 대부분은 과거 구소련 시절 군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전술 또는 구 소련의 표준형 전술을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일단 러시아군에 대응하고자 수도인 그로즈니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핵심적인 시가지 건물의 경우에는 최상층은 러시아군의 공중공격과 포격에 대비하고자 비워놓았으며, 러시아 보병의 건물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1층의 벽과 창문을 벽돌과 콘크리트로 아예 막아버렸습니다.


또한 도로에 노출된 벽면은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여 진입을 사전에 차단시켜버렸습니다.


물론 저렇게만 해버리면 자기네들은 이동을 할수없으니, 지하통로를 사용하여 건물사이를 연결시켰으며, 탈출을 대비하고자 사다리와 로프도 충분히 준비하였습니다.


미 해병대가 발표한 체첸군 편제에 따르면, 여러가지 혼재된 정보들이 있으나, 25명으로 이루어진 소대내에 각각 8명으로 구성된 공격분대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팀 구성을 보면


2명:LMG 사수


2명:RPG 사수


1명:정찰및 저격


1명:소총수 및 의무병


1명:소총수 및 통신병


1명:소총수 및 탄약운반병


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소대마다 82mm박격포가 엄호하였으며, 공격팀은 다른 부대와 협조하여 여러발의 대전차 로켓을 기갑차량에 명중시키는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RPG-7의 수량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기때문에 가솔린을 채운 화염병도 사용하였습니다. 


러시아군의 기갑차량과 병력들이 큰도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자,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도심깊숙히 이동한 러시아군의 기갑차량은 체첸군들이 설치해놓은 건축폐기물들로 만들어 놓은 바리게이트를 만나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정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동시에 건물과 옥상등에서 체첸군들의 대규모 사격이 시작됩니다.



저격수들은 지휘관이나 기관총 사수를 제거하고, 경기관총 사수들은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던 보병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공격을 받은 러시아군은 혼란에 빠질수밖에 없었고, 그틈을 통해 RPG 사수들은 기갑차량에 대한 사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선두와 후미를 먼저 공격하여 고립시킨뒤 대열전체를 공격하는 고전적인 공격을 선호하였고, 이는 제대로 먹혀들어갔습니다.



일단 체첸반군은 아프카니스탄전의 교훈으로 데려온 쉴카를 최우선 공격순위로 잡았습니다. 높은 고각으로 건물을 사격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보병전투차를 우선순위로 잡았습니다.


방어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쉴카 대공포나 장갑차들은 한발의 로켓으로 전투불능이 되거나 파괴되었으며, BMP-2의 경우에도 후면에 배취된  연료탱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쉽게 파괴하였습니다.


주력전차인 T-80의 경우에는 반응장갑이 없는 포탑후부나, 측면 케로젤 부분, 엔진실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1대당 5~6발의 로켓이 집중되어 공격당했습니다.


특히 케로젤 탄약장치를 맞은 전차는 그야말로 전차 뚜껑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화염병공격도가스터빈 엔진이었던 T-80계열전차에게 효과적이었으며 화재에 쉽게 불타 파괴되었습니다.


당황한 러시아군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집니다. 후퇴하려는 전차, 피하려는 전차가 서로 엉겨붙어 시가지 건물의 좁은도로에 갇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지원포격이나 항공지원 유도에 미숙한 전차병과 장교들이 사방에다 포격지원을 때리는 바람에 지휘관의 관찰 능력까지 상실하기에 이릅니다.


대담하게 체첸군들은 불과 몇십미터까지 접근하여 정확하게 목표물을 파괴시켰고, 밤이 되자 러시아군은 불빛만 보이면 사격을 가하는등, 밤새 오인사격이 지속되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날이 밝자 수많은 병력들이 사살당했고 68대의 기갑차량중 67대가 파괴당해있었습니다.


개전첫달만 62대의 전차가 완파 되었으며, 그중 61대의 전차가 반응장갑으로 보호되지 못한 부분에 공격을 받아 파괴된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체첸반군은 이를 놓치지않고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 서방언론을 통해 보도함으로써 러시아에게 수치감을 안겨주었습니다.


95년 2월에 러시아군이 어찌어찌 그로즈니를 점령하긴 하고, 두다예프 대통령을 96년 6월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동안 러시아군은 크나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94년 한해동안 2,221대를 체첸에 투입하여 250대의 차량을 손실하였으며, 1.2만명의 체첸군보다 4배이상이 넘는 5만명을 투입하였음에도 이를 압도적으로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96년 8월 체첸군이 다시 그로즈니 시가지를 기습하여 3천여명의 러시아군 병력을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러시아군은 당시 체첸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들로 대내외 여론이 좋지않았고, 구원군을 보낼 여력마저 없어 협상으로 1차 체첸전쟁을 종결시키고 96년 11월부터 군을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한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큰 타격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보복을 결심합니다.


99년에 러시아 내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테러로 국민들이 사망했고, 화가난 러시아 정부는 체첸반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2차 체첸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병력인 5만명으로 1차전쟁당시와 비슷한 병력이었으나. 러시아군의 새로운 전술개발과, 체첸의 내부 권력다툼으로 인해 체첸이 크게 불리했습니다.


일단 러시아군은 체첸군과의 시가전을 전면적으로 뚫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냥 도시를 다때려부수고 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시가전을 못하면 도시를 박살내고 들어가면됨 


​러시아군은 화학무기와 열압력 폭탄을 수뇌부에 요청했고, 수뇌부는 화학무기 사용은 금지하였지만, 열압력 무기는 허용하여 T-72의 차체에 30발의 220mm 열압력로켓탄을 탑재한 TOS-1 부라티노 다연장 로켓의 사격과 동시에 전투기가 동원되어 그로즈니 시내를 무차별 사격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습전과 후의 그로즈니 시내 사진.


그야말로 러시아군은 도시를 아예 폭탄으로 밀어버렸으며, 이때 사용된 열압력탄의 경우에는 벽을 뚫고 오는 압력파로, 지하실이 아니고는 피할수 없는 무기였습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공습이 끝나고 러시아군은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해 그로즈니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군은 기존 1차전쟁의 교훈을 받아들여 기계화 부대를 재편성하고, 보병도 크게 증원한 상태로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에 큰도로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건물,골목 사이를 모두 들어가서 경계및 제압을 하기 시작합니다.


방어력이 약한 BMD는 야예 퇴출시켜 버렸고, T-80과 BMP-2의 경우에는 RPG를 불발,조기 폭팔 시켜버리기 때문에 모든 슬랫아머를 장착시켜 버립니다.


또한 역으로 매복하는 전술을 사용, 러시아 기갑차량이 이동하면 차량을 파괴시키기 위해 접근한 체첸 대전차팀을 매복한 보병이 제압하였고, 도망간 입구나 구멍을 발견하며 주저하지 않고 열압력 폭탄을 이용한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2차 체첸전쟁은 러시아군의 일반적인 승리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체첸군은 그로즈니 남주의 산악지대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고, 도망치지 못한 체첸군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모두 수감됩니다.


현재 체첸정부는 사실상 붕괴상태.


뭐 두번째 전쟁은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1차 전쟁당시 워낙 러시아가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입었던지라... 95년 당시 쿠빙카에서 체첸전역 보고회및 반성회가 열렸는데, 그로즈니의 전투영상을 본 파블로 그라초프 국방상은 화를 내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차를 지킬수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라 명하였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장비가 대전차 미사일을 직접적으로 요격하는 '아레나 시스템'이 되겠습니다.


또한 연비소모가 심하고 1차전쟁에서 화염에 취약한 가스터빈을 장착한 T-80전차의 경우에는 중-장기적으로 퇴출시키고자 했으며, 주력전차를 T-72의 개량형인 T-90전차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수많은 피를 흘려 얻은 교훈이라고 해야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