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2장 오, 위대한 왕이시여 정리

무거운 빈가방 2020. 9. 21. 00:16

 <>의 코스모스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희망을 바라보려 한다. 역사의 큰 굴레에서, 아 여기선 크다는 말을 하면 안되겠네....우주력 1분 정도를 가지고.., 엄청 큰 족적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잘모르고 지나치는 인물들의 활동을 알려준다. 동시에 그들을 통해 진보를 바라본다.

 

이번 장은 이 책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나온다.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에 기여한 것도 없는 것 같은 인물.

불교역사에서는 빼놓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그가 처음엔 어지간한 폭군을 넘는 거의 극악무도한 반열에 올랐던 왕이다.

이 잔인의 대명사가 변하여 백성들에게 나름 생명의 터전을 마련하는 모습은 권력을 잡은  인간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 정치가들이 잘 변하던가! 꺼꾸로 나쁜 쪽으로는 매우 잘변한다.

국민들을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이론을 정립하고 몸소 실천하고 앞장서던 인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안면을 바꾸고 친일매국노들의 앞잡이가 된다. 그 누구 보다 더 심한 앵무새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모오, 김모수, 한모열을 가슴에 안은 머시기, 하모경.... 천지삐까린데 이름들이 기억이 안난다....

이리 변하는 사람들은 넘친다. 국당놈들의 상당부분이 저런 놈들 아닌가!

국당 놈들은 딛고 일어서기 힘들 때라도 원수 같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한 놈이 되어 자기들의 자양분이 되어 주니

죽을 때가 되어도  죽지않고 불사신이 되어 국민 착취를 계속한다.

 

이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고 암담한 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정반대의 길을 걸은 과거의 사람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 나온다.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에 보탬이 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은 사람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휴머니즘 과학자이다.

추수 뒤 흘린 낱알도 아까워 줍는 우리 어릴 때 행동처럼

<>은 사람의 이야기를 주워 우리에게 펼쳐준다.

광견병에 걸린 세상의 모습에서도,자 이러니 우린 희망을 버리지 말고 나아가야한다.!”

 

위대한 왕이시여!”란 제목은, 피로 목을 축이면서 승리에 흡족해 할 때 어느 승려가 그를 부른 것이 소제목이 되었다. 위대한 사람이고 수천명을 죽일 수 있으니 아기 한명쯤은 살릴 수 있지 않겠나이까 오, 위대한 왕이시여!”

그가 죽일 땐 멸종의 홀을 여는 사람이었지만 , 아기는 못살려도 사람을 살리려는 제도를 만들었을 땐 희망이 되었다.

 

2장 정리는 아래와 같다.

정리라기 보다는 빼긴 것이지만...(대부분의 사진은 코스모스에서 그대로 가져오거나 비슷한 것을 찾은 것이다.)

 

2, 위대한 왕이시여 : 농업-조로아스터교-자연선택-멸종의 홀-데카르트 아소카

 

농업 1만년, 코스모스 탐험시작 = 근시안적 사고와 욕심으로 우리 문명을 깡그리 무너뜨릴 수도 있는 상황/ 변해야, 우리 종에게는 스스로를 바꿀 능력이 있을까? 아니면 우리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로 내모는 무엇인가 있는 것일까?

 

남아공 쿠루만산맥 본테르베르크 동굴 불자리,100만년 전, ‘호모에렉투스’(일어선 사람)

불 피울 수 있는 곳 지구뿐, 4억년, 우주력 10일 동안, 대기에 산소가 적당히 많아져 가능한 일

 

조로아스터교: 불은 신성과 계몽된 정신의 빛을 뜻. 불관리.

 

<피르에 사브즈> 입구 전설에 따르면, 페르시아 사산 왕조 마지막 왕의 딸이었던 니크바노우가 이곳으로 피신햇다고 한다. 동굴에 맺히는 물방울은 니크바노우가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신전의 또 다른 이름인 착착이 거기에서 왔다. 똑똑이라는 뜻이다. : 코스모스 글>

 

<조로아스교의 석굴신전>

아후라 마즈다는 세상을 바르게 유지하는 상징 그의 요구는 매우 단순 : 불을 잘지킬 것, 좋은 생각과 좋은 말과 행동을 할 것 뿐. 그런데 이 단순한 요구도 지키지 못한다. 나쁜 생각, 사악한 범죄들

↔ 악의 상징(고양이 머리)인 앙그라 마이뉴 때문이기도 하다.

 

<앙그라 마이뉴가 소를 덮치는 모습이 새겨진 고대 페르세폴리스 부조 * 서양에서 고양이를 악마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연류되어 잇다 한다. 요새야 많이 둔화되었지만. >

개의 악마적 행동, 물린 딸이 미친 행동을 하는것 - 앙그라 마이뉴(악마)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 광견병 바이러스 때문.

바이러스는 어떻게 그토록 정교하고 전략적인 단계별 공격을 해낼까? 다른 생명체의 뇌에서 어떤 부위가 분노를 일으키는 회로인지를 어떻게 알까? 인간도 겨우 얼마 전에야 알아낸 사실인데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힘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아무리 고도로 전문화된 기능이라도 가령 바이러스가 숙주의 목을 마비시키는 능력이라도 종 전체에 퍼질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 기능이 생존확률을 높인다면, 기능은 후대로 계속 전해진다.

<총알처럼 생긴 광견병 바이러스는 컴퓨터로 재현한 위 그림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당단백질 못으로 세포에 들러 붙어서 운 나쁜 숙주의 성격을 바꾸고 망가뜨린다. >코스모스 책 사진을 찍음

 

21세기 들어 과학 기술은 유례없이 발전. 광대한 우주시공간, 나노의 세계도 열어 젖혔고, 3차원 현실을 어느 한 군데 빠진 곳 없이 매끄럽게 경험.

그런데 그 새로운 힘을 과학이 알려준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여행에 나서거나 자연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북돋는 일에도 썻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주로 대대적이고 파괴적인 죽음의 전쟁터에서 활약할 거대하고 위협적인 로봇들을 만드는데 썼다. 도시들과 수많은 생명을 깡그리 멸절시킬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의 검투사적 대결을 재현하는 짓일 뿐이지만 그런 짓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밑빠진 독같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또 멸종의 홀에 여섯 번째 분관을 이어 왔다. 생명의 나무에서 도중에 끊어진 가지들을 기념하는 홀, 지난 40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다섯 번의 대멸종 중 사라진 종들을 기념하는 홀 말이다. 그 홀에 지어진 새 분관에는 우리의 이름이 붙어있다. 인류세 대멸종이라고.

 

우리 몸의 모든 세포에 들어있는 40억년 된 생명의 경전, 그것이 궁극의 지휘자일까? 우리 존재란 경쟁하는 생명체들의 유전지침이 벌이는 대리전에 불과할까? 모든 동식물이 결국에는 유전자의 탈 것 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존재, 혹은 그야말로 졸개에 불과할까? 모든 역사와 생명이 결국 그뿐일까? 그 이상이 불가능할까? DNA는 운명일까?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소속된 더 큰 자연을 이해하는 일은 끝을 보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동물의 행동은 DNA에 이끌려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 꿀벌과 딱정 벌레가 심지어 거위도- 아무 생각 없는 기계라는 명제에도 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동물인 인간은 어떨까?

 

1969 데카르트 : 성령은 그에게 철학과 과학을 하나로 봉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우리가 무엇이 실제인지를 알려면 모든 생각을 엄밀하고 오류 수정적인 과학의 점검에 맡겨서 수학적으로 표햔되는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가 떠올린 그런 발상의 핵심에는 이후 현대 세계를 특징지을 요소가 있었다. "의심"이었다. 17세기 초에 이것이 얼마나 급진적인 생각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구신약이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는 교리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의심이야말로 지식의 출발점이라 여겼다.

 

곤충에게 의식이 있는가 ? 이 질문은 그저 딱정벌레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신중하게 저울질해 본 뒤에도 딱정벌레를 그저 DNA 의 프로그램에 따라 생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로봇에 불과한 존재로 간주한다면 이 결정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법이 있을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인간의 행동마저도 우리 본성에 프로그래밍이 된 DNA의 지시에 따라 이뤄지는 것일 뿐이라고 인정한다면 자유의지는 어떻게 될까? 선악을 논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인간 행동의 양극단을 모두 몸소 행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3년 만에 마우리아 제국, 인도북부+파키스탄, 아들 빈두사라, 304년 아소카

아소카는 보상을 즐길 순간이었다. 그는 시체가 빼곡하게 널려 있어서 그와 호위 무사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전쟁터를 느긋하게 돌보았다. 어디를 보나 죽음이 있었다. 시체들 속에서 승리감을 만끽했다.

 

남루한 승려가 축 늘어진 아기의 시신을 내밀었다. 아이 살려 보라.

. 위대한 왕이시여,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앗아 갈 만큼 강한 분이시여, 제게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십시오. 단 한생명만이라도. 이 죽은 아기만이라도 되살려 주십시오.”

아소카는 작은 시체를 보았다. 그 순간. 승리의 즐거움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마약처럼 그를 취하게 했던 힘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첫칙령 중 하나 : 모든 백성이 내 자녀다. 나는 내 자녀들의 안락과 행복을 바라니 모든 백성이 그러기를 바란다.”

 

열세번 째 칙령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했다. 칼링가 합병 직후부터 폐하게서는 경건한 법을 열성으로 다르고, 보호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칼링가 정복에 가책을 느끼셨으니, 이전까지 자유로웠던 그 곳을 정복하기 위해서 살육을 자행하고 포로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페하의 마음에 깊은 슬픔과 회한을 남겼다.”

학교 병원 대학 호스피스 여성도 교육 받도록. 모든 백성에게 무료 의료서비스, 의약품 누구나 구할 수 있도록, 우물 가로수 모든 종교를 똑같이 존중하라, 사형폐지

<티베트 불화에 그려진 개종 후 아소카, 부처의 손짓과 복장을 따라 한 모습이다. 동 시대 인도에서 그려졌던 그림들은 아소카에게 적개심을 품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몽땅 파괴되었기 때문에 자금까지 남은 게 없다. >

 

<아쇼카 대왕의 칙령에 사용된 네 가지 문자: 브라흐미 문자(윗줄 왼쪽), 카로슈티 문자(윗줄 오른쪽), 그리스 문자(아랫줄 왼쪽), 아람어 문자(아랫줄 오른쪽).>
<. 아소카는 자신의 칙령을 새긴 석주 꼭대기에 종종 바큇살이 24개인 바퀴를 딛고 선 사자 네 마리를 올려두었다. 불교의 상징인 바퀴, 즉 법륜은 나중에 독립국가가 된 인도의 국기에 그려지게 되었다. >

 

아소카의 연민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에게 미쳤다.

동물을 바치는 희생 의례와 몰이로 사냥하는 것 금지. 인도 곳곳에 동물 병원,

그는 친족의 범위를 모든 생명을 포함하도록 확장.

아들 상속 x 왕의 후계자가 아니라 가장 계몽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음.

재위 36년간 말년에 청년시절처럼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분노를 간헐적으로 터뜨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증거를 보자면 계몽군주로서 통치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죽이어졌던 것 같다.

 

인도 바라바르 언덕에 있는 로마스 리시 석굴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몇안되는 아소카의 사원 중 하나다. 글귀가 좀 새겨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 석굴 내부는 놀랍도록 장식이 없다. 하지만 독특한 특징이 있다. 메아리가 보기 드물게 잘 울리고 길게 지속된다는 점이다. 반들반들한 석굴 벽에 부딪혀 반향을 일으킨 소리는 차츰 희미해지다가 벽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 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 뿐이다.

하지만 아소카의 꿈은 다른 듯하다. 그 메아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