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의 희망뚜벅이 다샛째에 참여하다.
--- 제목은 그를듯하지만 마 잡설이다.
1월1일 눈보고 싶어 선암사로 간다. 아치형의 다리 아래서 사진찍고 절을 한바퀴 돈다. 그 와중에 자랑질 하려고 심수환 화백에게 사진 보냈더니 밀양이란다.
김진숙 복직을 위한 청와대 까지 걷기에 동참 중이라고.
미안하다.
곳곳에 잘못된 정책과 기업의 횡포로 사람이 죽고 해고 당하고 길거리로 쫓기는데 난 하루하루 즐거움만 추구하고 있으니 미안함이 가슴을 친다. 눈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금방 잊고 눈을 즐기며 놀다가 돌아온다.
계속 한칸 찝찝함 때문에 아무래도 하루는 걸어야 겠다.
1월 2일 밀양역-상동역 구간은 <프록시마프로젝트> 보려고 흘리고, 1월3일 좀 더 먼 상동역으로 간다.
내가 밍거적거리니 심화백이 전화 와서 같이 가겠다 한다. 용기 백배!
드디어 부르조아의 특성인 개미 눈물만큼의 동참으로 위안을 삼는 행동을 한다.
차로 상동역을 간다.
암으로 힘들어 한 소방대원인 서로 아는 친구 이야기도 한다.
상동역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다들 마스크 끼고 있으니 누가누군지도 모린다. 하긴 얼굴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주전자에 물 끓여서 가져온 잔으로 믹스커피 한잔 맛있게 마신다.
아 “조선학교와 함게 하는 시민모임 봄” 사무총장님도 오셨다. 반갑다.
우리 둘은 “봄” 대표로 참여한 셈이다.
김진숙 위원장(모두 “김지도”라 부르는데 난 위원장 시절에 만났기에 그냥 위원장이다.)은 암투병 중인데도 당당하다. 상징적인 여름 부채 하나 들고 앞에 선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에겐 인사가 중요하랴!
국민혈세를 퍼부어 살린 “한진중공업”.
정부는 이 한사람 복직 시켜주는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정당이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는 법을 만드는데 앞장 설 리가 있겠나!
<이창우 화백의 펫북에 실린 그림이다. 아래그림 뒤쪽 어딘가에 나도 있다>
국도는 참 걷기 힘든 곳이다. 사람이 지날 곳이 거의 없다. 위험 천만이다.
앞선 차량이 행렬을 인도한다.
바람은 세고 길은 좁고. 우린 마스크 덕분으로 추위를 조금은 더 견딘다.
청도새(어느날 고속도록 휴게소가 청도새마을... 이란 간판으로 바뀌었다. 박그년 때다. 그 때 부터 난 "청도새"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를 지나니 ‘새마을운동 발상지 건물’이 보인다.
지랄도 참 여러 가지로 한다. 저거들이 성지로 생각하는 건물이 완존 군대 빼치카 같다. 위에 포신만 몇 개 두면 저거들이 원하는 전쟁할 무기가 되것다.
저거 짖는다고 돈 얼마나 많이 삥땅쳤을까!
<우린 새마굴 깃발 아래 묵묵히 걷는다.>
매우 상징적이다.
그들의 마굴은 어디 가고 이 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허덕인다.
저 마굴운동으로 농촌을 황폐화시키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대거 유입되면서 지금의 해고노동자 일자리 잃은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다.
도시화와 자본화의 진행은 농촌을 제대로 지키기는 어렵지만 우린 한방에 이뤄진다.
‘다카키 마시오’가 개발독재를 하기 위해 농촌을 한방에 훅가게하는 전략으로 택한 것이 “새마굴운동”이니 전국 농촌의 몰락은 지극히 당연한거다.
쉬도 안한다. 중간에 간이 화장실 지역에서 잠시 쉬고는 계속 걷는다. 14키로 거리에 단체로 걸으니 보통 4~5키로 구간에서 한번씩, 두 번은 쉬어야 한다. 근데 강행이다.
김진숙위원장이 쉬는 것을 별로 안좋아한단다.
쉼없이 달려가며 산 위원장...거리에서도 그는 빛난다.
봄 사무총장은 “ 다리가 짧아 따라 간다고 반은 뛰었어요.....”
그래 많이 힘들었겠다. 차차 내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ㅋ
아무튼 우린 청도에 무사히 도착하고 사진 찍는다.
난 집행위 같은 사람에게
“ 걸은 값은 어디 냅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 아 투쟁기금..” 이라며 계좌번호 주려고 한다.
집에가면 마음 달라진다 하니 받는다.
20만원 전달하고 나니 내 비닐 지갑에 5만원이 약간 걸려있다.
사진 찍던 남자가 “ 이것도 줄려한 것 아닙니까?”
우린 웃는다. 이 힘 든 싸움에서 이런 위트는 있어야지.. 그래야 살아남고 더 활기차지.
난 이것을 흔쾌히 드려야는데....
주머니 얼릉 넣는다. “밥도 묵고 차비도 하고....” 치사하다.
심화백은 밥은 우짤거냐고 묻는다.
버스 타고 밀양가서 밀양에서 어탕국수 먹자한다.
좋다한다. 그래 놓곤 중간에 당이 떨어져서 힘들었다는 이야길 한다.
여기서 먹자는 이야기인데 난 눈치도 없다.
심화백도 배고프면 배고프다 해야 알아듣제, 남 배려의 고수라 직접 말을 잘못한다.
<봄> 사무총장이 눈에 밟혀 여기서 먹자하니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세치서 추어탕 한그릇씩
심화백은 밥 한그릇 더 시켜 그냥 뚝딱.
총장님도 후후 불며 자알드신다.
큰일날뻔 했다. 여기서 안먹었으면 엄청난 원망을 들을 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표 끊다. 시골버스 참 쨉싸다. 30초 사이로 버스 놓친다.
45분 더 기다려야 하니 동네 한바퀴.
이제 촌동네는 특징이 다 없어졌다.
썰렁한 지역을 썰렁하게 걷는다.
상주, 함창, 무주.. 여러 곳 장날에 봐도 이젠 시골은 온기가 없다. 사람이 없으니 그렇겠지. 일자리는 사라지고 황량하게 거리만 남는다. 살리려고 돈 붓는 척 하고 삥땅하는데 어이 더 유지가 되리.
드디어 버스 탄다. 승객은 총 3명. 조금 있다 내리니 우리 둘만 남는다.
<한재>라는 곳으로 들어간다. 위로 올라가는데 오른편 계곡 엄청나다. 빼곡이 차 있는 비닐하우스.
<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이곳엔 풀 한포기 자랄 공간 없이 모두 비닐하우스를 만든 것 같다. 소농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플랜테이션 농업이다. 길옆 가게들도 모두 <미나리 삼겹살>이란 간판이다. 난 미나리하고 삼겹살 먹는 것은 작년 처음 알았다. 강도사 덕분에. 근디 이미 이리 먹은지 오래되었다니.!
먹는 것엔 매우 둔감하다.
이유가 있다.
내하고 같이 사는 여자 분은 <섹시하고 동생같은 마누라>인데, 요리도 잘하니 밖에 나갈 생각이나 있겠나!
한제 꼭지에 도착하니 기사분이 종점이란다. 오잉!
상동역 간다하니 안간단다. 다른 5번이 간단다. 긋참... 정말 웃기네 번호를 달리 하든지.
큰길에 내려달라하니 원래 안되는데 하면서 그리해라 한다.
문디 기사님..
탈 때 표 주고 자른 뒷부분 달라했더니 뭐하라라고 그러느냐 묻는다. 기념이다 했더니 뭐 그런 기념도 있냐고 하면서 재활용 한단다.
재활용이 아니라 승객수 작다고 조작하는 건데 그걸 재활용이라 표현하네....
승객수를 얼마나 많이 조작할꼬!
그래도 시골 구석구석 다니도록 정부서 보조금 주니 운행하는데 문제되면 운행 안한다고 지랄할까봐 고발 하기도 망설여 진다.
국고는 이리저리 촌동네에서 대도심 중앙부 까지 새고 새고 또 샌다.
아는 놈만 이 물을 쳐먹는다. 국민은 죽자고 물공급 해주곤 목 말라 헥헥거린다.
21세기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이리 산다. 희망이란 덧없는 돛을 달고 나아가보지만 그저 망망대해일 뿐....
큰길에 널짜 준다. 그러고는 밀양쪽으로 가버린다.
이게 뭔미?
우린 말한다. 저거 분명 상동역 가는걸꺼다. 최대한 가까이 내뤄주면 되는데 이게 뭐냐.
검색해 보니 2.5키로 정도다.
우린 요상한 경험을 하나 추가하고 다시 걷기로 한다.
약간 절뚝이는 심화백도 용감히 길을 나선다.
좀 있으니 아래에 마을이 보이고 마을을 흐르는 강이 멋지다. 유천이란다. 엣날엔 상동역도 유천역이라 했다한다.
우린 시원한 그림을 보면서 유천으로 간다.
옆으로 난 길 지나면 밀양이겠구나....
가까이 가다 보니 안내판이 “경북‘이라 되어 있다. 밀양은 경남인디... 오른 쪽 골목을 쳐다 보니 다른 길이 있다.
자신있게 당당히 걷는 심화백에게 저길 아니냐고 묻는다.
우린 또 길을 헤맬뻔 했다.
골목으로 들어가 큰길로 가는 바른 길을 잡으니 입구에 아까 도망 간 그 차가 있다. 쫓아가서 붙잡고 싶은데 눈치 챈 양 가버린다.
문디 지랄같은 놈... 유천에서 내려줬으면 될낀데....
우린 또 걷는다.
우린 똥이야기 밥이야기 하며 낄낄대고 걷는다.
내가 정류장에서 똥 안눗으면 길에서 쌀뻔했다는 둥
청도에서 밥 안먹었으면 심화백은 배낭 뜯어먹었을거라는 둥...
이 지역에서 옛날 텐트치고 있다가 비가 내려 피신한다고 욕본 이야길 심화백은 한다.
잘못 탄 버스 덕분으로 우린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내 주변 사람 중 가장 활기차게 세상에 대해 공정한 마음을 표하는 심화백과의 하루는 이리 기분이 좋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범주없이 활동하는 심화백에겐 건강과 슬기로움이 늘 함께 하시길....
상동역이 눈앞에 다가오니 역 모습이 더욱 정겹고 반갑다.
이제 시동걸고 집으로 가면 된다.
도착하고 헤어 졌는데 심화백에게 전화가 온다.
시작할 때 이야기한 그 친구가 오늘 2시에 운명을 달리했다한다.
밀양에 있을 때 알았으면 방문하여 이별을 고했을 것인데. 지금은 너무 늦다.
즐거운 하루에 마무리는 슬픔 가득이다.
그 친구에게 톡을 보낸다.
그는 읽지 못할 것이지만 있는 듯 눈물로 보낸다.
“ 오늘 밀양에 갔다 오면서 소식 궁금했는데 집에 오니 자네가 오늘 2시에 명을 달리 했다는구먼..
톡을 안읽어서 많이 안좋구나 생각은 했지만 이리 급히 가실 줄 몰랐네.
잘가시오.
좋은 생각들 즐거움 가득한 친구라 어디든 즐겁게 잘지내겠지.
고통 훌훌 벗고 잘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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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북에 실린 이창우님의 글을 올린다. 허락받기 부끄러워 그냥 몰래..
우리가 같이 걸은 걷기날에 대한 이야기다.
www.facebook.com/photo?fbid=5178286582211475&set=a.152250868148430
이창우
1월 3일 오후 8:55
김진숙의 희망 뚜벅이 닷새째
영하의 날씨에는 체력 소모도 많습니다.
김진숙의 희망 뚜벅이들은 밀양 상동역에서 청도역까지 걸었습니다.
아픈 다리 주무르며 서로 힘을 내자고 격려하면서 걷고 또 걷습니다.
오늘은 ‘오씨 3대 한의원’의 한의사님이 원기를 잃지 말라며 한약을 다려 오셨습니다.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체력의 바닥까지 짜내어 걷는 김진숙을 생각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뭐라도 내고 싶었던 심정이었으리라 헤아려 봅니다. .이렇게 응원하는 분들이 계셔서 뚜벅이들은 힘을 잃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면 갈수록 힘이 더 붙습니다.
청와대 앞에서는 김진숙 복직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대로 처리하라는 단식이 또 13일 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청와대 앞 농성장은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 드는데 천막도 없이 찬 별을 보고 길바닥에 눕습니다.
김진숙지도위원이 오늘 올린 트위터 사진을 보니 노숙 단식자의 침낭 위로 얼음 알갱이가 덮혀있더군요.
단식만으로도 힘들텐데 천막도 치지 못하고 영하 12도,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의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고 있으니 그 참상을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겠습니다. 2019년 11월 자한당 황교안씨가 청와대 앞 농성을 할 때는 천막을 치고 하던데, 노동자들에게는 천막도 치지 못하게 하고 이리도 모질게 굽니다.
오늘 송경동 시인님이 소셜미디어에 이런 소식을 올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청와대 단식단으로 지난 31일 건강문제, 여타 사회운동 역할 문제 등으로 단식 중단을 권유해 복식에 들어가셨던 NCCK인권센터 소장 박승렬목사님께서 심한 탈수 증상으로 오늘 새벽 응급실에 가셨고, 입원치료 받으셔야 한다고 하여 입원하셨습니다. 지병들이 있음에도 혹한 속에서 종일을 떨며 단식해왔던 후유증인 듯 합니다. 모두 쾌유와 응원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와대 앞 단식 농성자는 정홍형(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 송경동(시인), 김우(권리찾기 권유하다 활동가), 한경아(새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대표), 성미선(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님 등입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서영섭 신부님은 일을 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 모두 위장이 오그라붙고 뼛속까지 얼음이 박히는 고통 속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서로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콧방귀만 끼고 있습니다.
왜 청와대 앞 농성이냐고요?
35년 전 김진숙의 해고는 단순히 일개 기업 차원에서 자행된 것이 아닙니다.
20대 청년 김진숙은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 노조 대의원으로서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촉구하는 지극히 합법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정권의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속 수감되는 등 국가 폭력의 희생자였습니다. 지금 대통령은 당시 부산의 인권 변호사로서 김진숙에게 가해진 박해가 부당함을 힘주어 말했고요. 이렇게 해서 해고된 김진숙의 부당해고 사건에 대해서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 위원회’는 한진중공업에서의 노조민주화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고 김진숙 등에 대한 해고는 부당해고라고 분명히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버텨왔습니다. 그 후 당시 함께 해고되었던 박영제 등은 복직되었으나 유독 김진숙만은 제외되었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이지요.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당해고임에도 원직 복직을 거부하는 자본가에 대해 국가가 손발을 놓고 있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덧.
경로가 일부 변경되었습니다.
내일은 쉬고, 모레 청도역에서 팔조령휴게소까지 갑니니다.
다음 날은 스파벨리앞 음식거리까지 -> 대구역 -> 추동나무 휴게소 -> 신동역 -> 칠곡역(왜관역) -> 보손 보건진료소 -> 남면 우체국 -> 김천역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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