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상동과 부평동 : 아 추억들이여!

무거운 빈가방 2020. 12. 20. 00:33

서동 동상동..

             <미로 시장 윗 골목에서 시장 건너편 길 명장동 산꼭지 쪽으로 바라 본>

 

누구에겐 삶의 지독한 굴레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겐 추억이 될 수도 있다.

 

3때 전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괜찮은 후보가 있었는데, 이 아이의  강적으로 떠오른 아이가 이사장 아들이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이사장 아들 찍을 것과 또 찍어라는 이야기를 전파하라고 강요한다. 이것에 분노한 급장 준필이는 몇몇 앞에서 "이건 명백한 부정선거이니 어떻게 행동을 해야겠다"고 선포한다. 우린 이 사건으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덜익은 시절이지만 잠시 정의로 활활타올맀다. 이렇게 준필, 명훈, 동철(짜리), 4명은 운명인양 뭉쳤다.

 

고딩 때 뿔뿔이 흩어졌지만 정기적으로 한번씩 만나고 놀러도 갔다. 모임 이름은 <등머덜>이라 하였는데 청학동 앞바다에 조그만 돌무더기 섬 갈매기 섬의 우리 말이다. 지금은 이 섬도 사라졌다. 항구와 도시 개발로.

짜리는 입담도 좋고 힘도 좋다.(키는 매우 작지만..... 그래서 우릴 짜리-뚱이라고..)

난 짜리를 엄청 따랐다.

어느 날 청학동에 살던 짜리네가 대청동으로 이사를 왔다.

한 식구가 같이 산다. 형 동생 엄마.

그러다 동상동으로 이사 간다.

중학교 때 아버지 돌아가신 뒤 어린 형이 사업을 이어 받았으나 그대로 망해버린거다.

우리집 부평동에서 동상동 까지는 거리가 참 멀다.

제법 잘살았던 명훈이는 보살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마음대로 써도 용납한다.

우린 명훈이 자전거로 왕래를 했다.

내가 자전거를 몰고 동상동 까지 가서 두고 버스 타고 돌아오면, 짜리가 몰고 부평동으로 오는 식이다.

대체로 내가 왔다갔다를 많이 했지만..

 

지금은 명장동은 아파트 촌이다. 그 땐 그냥 논밭이다. 아직 충렬사도 짓지 않았다.

자전거타고 한참 가면 명장동 쪽 논과 군부대를 옆으로 하야 좀 더 가면 마을이 나온다. 동상동(서동)이다.

 

서동은 인구밀도가 당시엔 더 높았다. 시장도 발디딜 틈 없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서동에서 빠져나오는데 충열사쪽에서 길이 헷갈렸다. 그 땐 별 표식이 없었으니 그래서 왼쪽으로 돌아 쭈욱 가는데 가도가도 제대로 된 길이 안나오더만, 갑자기 수영이 나오는 거다.

비행장이 아직 살아있었고 자전거를 모는데 바다와 모레가 바로 곁이다.

당시로는 너무 멀리 돌아서 당황해 풍경을 즐길 겨를은 없었지만 바다를 옆으로 달리는 기분은 참 시원하고 좋았다.

 

시장통에만 살고 다닌다해봐야 겨우 구덕산이나 용두산 그리고 수산 가는 것 외에 어디 가본 적 없었다.

그러니 해운대 지역은 그저 낫설기만 하다. 돌아오다 부둣길로 들어가게 되고, 지금은 좁은 듯 보이지만 당시 비행장 같이 넓은 부두길..

그리 돌아돌아 집으로 왔다.

 

서동 미로 시장.

짜리 집이 시장 근처 그 좁은 골목에 있었고, 짜리 엄마는 시장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다. 그 땐 이름이  미로시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짜리네는 돈이 없어서 내가 모은 돈을 드렸다.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큰돈은 분명하다.

5만원? 10만원? 20만원?

최대치다.

엄마는 그것으로 빵틀을 사셔서 삼촌이 나름 자리 잡은 미로시장서 길거리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끔 나도 빵을 구웠는데 탄 것을 좋아하다 보니 빵도 태워 내 놓았다.. 사람들이 잘안사니 내가 구운 건 내차지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자다 하면서 천원인가 이천원을 주셨다. 난 당황스러워 눈물이 나왔다. 감격이 절대 아니고. 주시면 안된다고.. 다음에 장사 잘되어 돈이 되면 한꺼번에 갚아라고..

근데 아직도 못받았다.

어머니는 충청도쪽에 계시는데 우리 어머니들 보다는 좀은 젊고 건강하시다. 북에서 피난 오셔서 아들 셋을 놓아 키우셨다.

못뵈은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잘지내시리라 생각한다.

 

다닥다닥 붙은 서동 골목..

지금도 여전하다.

아침에 마눌님 조기종 치과에 내려드리고 시장 한바퀴 돈다.

문을 열기 시작하고 전을 벌리기 시작한다. 이젠 사람들이 많이 줄었을거다.

여기 사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굴레일수도 있지만 내겐 추억이다.

추억에도 계급이 있는 모양이다.

길건너 맞은편 언덕으로도 닥지닥지.. 골목 거리거리 3미터면 엄청 넓은 것이고.

골목이 횡으로 길이가 장난 아니다. 그냥 기분에 몇키로쯤 되는 것 같다. 멀리 아득하다.

좁아 낮엔 햇빛이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 한낮이면 해가 하늘한가운데 자리 잡으니 그제서야 골목을 따뜻하게 데워주겠지...

덕분에 과거를 잠시 생각해 본다 자주 못보는 중딩 친구들도 떠올려 본다.

중심이었던 준필이는 의사로 자리 잡았다.(도심지 응급시스템에 대해 수원시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다.)

대학에만 있다 보니 개인병원으로 돈버는 사람이 때론 부럽기도 한모양이다.

이전 한번 볼 때 가끔 돈타령을 했다..

어릴 때부터 가진 의협심이 어디가나.. 떠나지 않고 학교에서 열심이다.

 

잘살고 있는 명훈이, 힘들지만 잘버티고 있는 짜리.

우린 중3에 만나 신나게 지내고 신나게 살았었다.

 

간만에 서동 미로시장을 걸으면서 온갖 생각이 난다.

 

부평동 시장

 

목요일 김용균 2주년 행사에 참여하러 가기 전에 부평동 시장엘 들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골목마다 추억이 붙어있다.

자갈치에 내려 걷는데 엣날 왕자극장(그 뒤 아카데미, 그 뒤 은아극장? 순서가 바꼈을 수도)을 다시 리모델링 하는지 안을 뜯어내고 있다.

이 극장에서 영화를 참 많이 봤다

그 땐 2류극장이었는데도 매우 크서  영화 보기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독수리 요새>(1968,브라이언 허튼), <바람과함께사라지다> 등이다. 이 두 영화는 워낙 유명하여 자리가 없어서 낑겨 서서봤다.

50 다 되어 겨우 먹어 본 <한양족발>을 지나니 <곱창골목>이다.

부평동 살면서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곱창, 한양족발은 이제 먹어봤지만 부평동 곱창은 지금도 못먹어 봤다.

근처에 풍년상회... 아마 내 꼬마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름만 같을 수도 있겠고. 그 땐 풍년이란 이름이 많았다.

골목 돌아 살던 옛집이 나온다. 원래다다미 방 비슷했고 요새 말로 일종의 연립주택이었다.

2층 구조인데 한층당 다섯가구가 살았다. 2층에서 뛰면 진동이 그대로  전달된다. 화장실은 각 층에 하나씩. ㅋ냄새도 많이 났지만 그리 살았다.

<그집앞은 참 오래된 집이다. 장사 잘되는가는 모르겠지만 우리하곤 관계없는 선술집?이었다. 입구가 새로 지은 우리집이다. 1층집은 1층 4층을 가지고 2층은 2,3층을 가졌다. 옆에 건물이 우리집 해를 잡아먹어 암흑가로 만든 주범이다. 지금은 공용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엔 해가 잘들어 왔는데 옆에 5층(4층?)이 들어섰다. 빛하고 빠이빠이다. 우린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 몸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공간만 남겨두고 지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지만 여전히 사람많은 시장으로 들어가 식혜(1키로-2만)와 순대(7천-보통 두번 저녁으로 먹는다) 를 사서 서면으로 간다. - 이 날 서면은 너무 추워 개떨듯이 떨다가 동무들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갔다. 

<가슴 아프다.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 우리의 아들 딸들이  일을 하다가 몸은 저렇게 사라지고 옷만 남아있구나....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김용균은 계속 죽고 있다... 국회는 범죄를 두고 노동자들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모른체 한다. 그러고서는 마치 걱정 하는 척 펫북이나 찌라시에 대고 말씀들 하신다. - 출근한 자식이 죽어 돌아오는 세상을 만들지 않겠노라고...- 개같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