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21-09-20)
목욕탕에서 쓰러져 폐에 물이차면서 심 정지가 된 모양이다. 잠시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정지되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평소에 매우 건강하셨다한다. 갑작스런 비보다.
이전을 생각해 보면 12년 전에 쓰러지신 적 있다. 그 때는 내가 왕초보 때라 부산수련원으로 모시고가서 아무 일 없는 듯 잘극복하셨다. 하긴 지금 내가 한다면? 별 자신도 없네....
그 다음에도 목욕탕에서 쓰러지셨단 말을 들었다.
이런 정도면 건강하다고 말하긴 조금 애매할 것 같다.
쓰러지신다는 것은 목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앞으로 꺽이고 등이 좀 굽어 몸과 뇌의 소통이 조금 부실했을 것 같다.
따뜻한 목욕탕 물은 어떨까?
연세가 있으시니 몸 조율이 원활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탕 속에 있다보면 근육이 늘어나 신경을 제대로 못붙잡을 것같다.
몸 전체가 느슨해 지면서 심장을 잡고 있는 근육도 풀어져 버릴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것이 풀려 흔히 말하는 '정신줄을 놓는다'는 표현 처럼 자신도 모르게 기절 비슷한 것을 할거다.
젊은이도 들어가면 잠오고 늘어지는데 연세드신 분이야 더 그럴것이겠네.
우리 어머니도 한번 그런 적 있었는데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가셨다.
아무튼 친구아버지는 회생을 못하셨다.
가루가 되어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와 합장하여 생을 마감하셨다.
장례에 참석하면서 울어머닐 떠 올렸다.
나는 내 어머니 상에 다른 사람 개입을 최대한 없앴다.
마지막 날 상차리고 인사하는 것도 음식만 달라 했다.
보통 장례하는 사람들이 와서 진행하고 누구 절해라 누구 뭐해라 한다.
난 이게 너무 싫다. 고인을 모르는 사람이 절차를 아는 양 지시하는 것이 매우 이상하다 생각한다. 돌아가신 분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성의를 다하여 추모하면 그 뿐이다.
그래서 그냥 우리 알아서 추모하고 끝냈다.
혹 말하고 싶은 사람은 절하고 말하라하고...
누군가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장하고 각자 차로 장지에 갔다.
난 어머니 가루를 범어사 근처에 뿌릴 생각이었다. 근데 마눌님 반대에 부딪쳤다.
형도 반대하고
할 수 없이 아버지 계신 산소로 간다.
누나는 더 통곡한다.
그곳에 맨 위에는 할아버지 아래에 할머니
그 아래 아버지와 큰어머니
울엄마는 가루 되어 매우 귀퉁이에 그냥 땅을 살짝파서 묻는다.
죽어서도 봉분 없다 통곡한다.
내가 뿌린다는 것을 왜 말안듣지?
할매는 살아생전 화장하고 무덤 안만들길 원했고 나도 동의 했다.
모두 다 내가 조작한거라 생각한다.
울어머니 생각보다 총명한 사람이고 앞가름 다했다.
총기있을 때 나하고 약속한거다..
산소엔 자기의 땅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
아뭏든 산소에 묻고 난 뒤에 마음이 아파 얼릉 가서 파 범어사에 뿌리려 했다.
늦었다.
산소 정비하겠다던 형님이 정비하여 상석도 세웠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지도 않았다.
그냥 다 화장해서 하나로 하겠다 하더니 왠 정비?
사자에 대한 태도에서 난 너무 무정하다.
장례란 것은 모두 산사람들의 생각을 발현하는 것이다.
나름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만 모두 그 지방의 자연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장례가 만들어졌고 종교라는게 개입하면서 그들의 권력과 이권그리고 상업성과도 결합되었다.
이건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지금도 엄마를 뿌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후회가 많이 된다...
이 또한 어떤 의미가 있겠노만은...
살아생전에 어머니 인생을 다 듣질 못했다. 아쉬움이 많다.
영천 태생인데 , 17살(?) 정도 쯤 끌려가서 서울근교에서 실을 만드는 공장에 일했다한다. 이 실로 군복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되엇단 소식을 듣고 잘못될까봐( 다 죽일거란 소문이 났던 모양) 공장에서 담벼락 넘어 탈출했다하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실을 뭉태기로 가슴이나 몸에 숨켜서 도망왔다 한다.
“ 그게 뭐라고 그걸 가져갈거라고 난리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강제시집(민며느리 형태로 보내졌는지....)을 간모양이다. 이 부분에선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내용상 그렇다. 도저히 살기 싫어서 집으로 도망왔다 하네. 남자가 찾아왔단다. 같이 가자고 여러 번 이야길 하는데 그렇게 싫었단다. 혼자가라고 했다하네. 결국 혼자 갔단다.
전쟁이 일어나고 부산으로 피난왔다네. 당시 동아대학교 총장 사택에 식모로 지냈단다.
누군가 중매를 서서 나이 많은 남자하고 만났다네. 그게 내 아버지다. 근데 나이 많은 남자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딸도 있었다.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죽어 아들을 놓으려고 애를 많이 섰다. 그런 와중에 엄마를 만난거다.
내 어릴 때 기억에 엄마는 보따리 싸고 도망간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이게 한번씩 아버지 길들이기나 불만의 표현이었겠지...... 동생과 나는 붙잡고 가지마라고 울은 적이 몇 번 있다.
그 때 마다 “속아서 살게 되었는데......”하는 하소연을 들었다.
내 (엄마 자식들 모두) 호적엔 엄마가 큰엄마로 되어 있다. 아이를 낳았으나 정식 결혼이 아니었기에 자식은 모두 다른 사람 아래에 있는 거다. 그리고 평생 “동거인”이란 명칭으로 호적에 올라있었다.
고향은 “함경도”로 되어 있다. ‘영천’이 고향임을 증명할 길이 없어서 전쟁 등의 혼란기에 피난 온 것으로 하여 올렸단다.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김동령,박경태)에서 주인공 "박인순"은 원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죽은 사람 이름을 호적에 올린거다. 어릴 때 길을 잃었는지 부모가 버렸는지 자기 이름도 없이 기지촌에서 살았었다.
울 엄마는 어쩌면 기록상 귀신같은 사람이다. 자기의 정확한 정체성은 하나도 없다. 그냥 자식이 자신의 흔적인 셈이다.
학교 기록부엔 큰어머니가 엄마로 기록되니 두분이 모두 나하곤 50살 이상 차이가 난다. 초딩 때 엄마 아버지가 모두 다 60이 넘었으니 담임들은 다 알았을거다. 난 그런것에 대해선 둔감했다. 아무 생각없었고 고등학교 때도 여기에 대한 갈등은 없었다.
가끔 둘째누나와 엄마가 싸운 이야기를 들어서 매우 가끔 둘째 누나에게 짜증을 내는 경우는 있었다. 그렇다 하여 심한 갈등이나 싸움은 없었다. 우린 모두 다 좋아했고 모두 다 얼커니설커니 살았다.
큰어머니는 주로 촌에 계셨고 명절이면 부산에 오셨다.
명절은 좋은 기억이 없다.
친인척들이 왔다가면 식모 취급 받은 엄마는 혼자 소리 지르고 그릇을 던지기도 했다. 큰어머니하고 다투곤 했지만 큰어머니는 세상 물정엔 매우 어두운 사람이다. <예의와 먹는 것> 외에는 아시는 게 거의 없었다. 어릴 때 별 부족없이 곱게 크신 모양이다. 당시 외삼촌(큰어머니 가계)들 모두 제법 근사했던 것 같다.
싸움은 싸움이 아니다 고함을 지르다 스스로에 지쳐 싸움은 끝이다. 서로 다른 말만하니 , 대화가 안되니 싸움이 될리가 있나!
< F1963 갤러리 '부산국제사진제'에 전시하고 있는 "문익희 작가의 - 비녀 이야기" 사진이다.
뒷모습이 큰어머니를 연상시킨다. 평소 단아했던 것과 영판이다. 작가 허락 받고 실은 건 아니다. >
한 때 큰어머니는 형과 내가 다 크고 나니 당신을 배신했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말도 맞다. 우린 어릴 때 장사하러 나가 집에 없는 엄마 보다 집에 늘있는 엄마가 좋았다.
아 같은 집은 아니었다. 엄마는 부산에 큰엄마는 수산에. 난 초1 때 까지 수산에 있었고 덩치는 있으나 겁 많아 늘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는 것 보고 날 아버지가 부산으로 델꼬 오셨다.
방학이면 수산에서 큰엄마와 지냈고 형이 취직하고 지방으로 발령 받았을 때 큰엄마도 따라가서 형님 밥을 해주면서 살았다.
큰엄마는 자랄 떼 실제로 우리 엄마였다.
진짜 엄마가 가끔 수산에 오면 잔소리할 까봐 쪼린 기억이 난다.
당시는 진짜 엄마가 많이 썹썹했을 수 있었겠네....
부산으로 와서는 이제 같이 살았으니 별 문제는 없었겠지..
또 큰어머니는 " 나는 잘못 없다. 아들 둘이나 놓아주었다. 근데 제대로 키우지 못했는데 내가 뭔 잘못이고...."
아들 둘이 모두 다섯살 경에 죽었다 한다. 이유는 물어보지 못했다. 엄마든 큰어머니든 모두 다 나름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산거다.
이런 걸 보면서 "태어난 순간 빚을 진다"는 생각이 든다.
난 큰어머니의 고통과 아들의 죽음 덕분으로 태어난 거다.
그렇네 탄생도 모든 자연에 빚이다.
두죽음으로 내가 태어났다
내 삶은 큰어머니와 형들에게 엄청난 빚을 진거다. 물론 태어난 걸 원망할 수 있겠지만 다소 힘들더라도 비교적 잘자랐고 그냥저냥 살고 있기에 원망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나의 탄생에 이런 희생들이 바탕이 된거다. 더 많이 있겠지만... .
엄마는 장사한다고 늘 사거리 시장에 있었다.
나를 낳고 다음날 시장에 장사하러 갔다 한다.
생활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못다녀 한글을 모른다. 나중 글을 가르쳤는데 잘안된다. 당신의 이름을 적는데 제법 웃기고 가슴 아린다. 숫자는 적고 읽을 줄은 안다..
<김말란83세 , 딸 큰아들 집 전화번호. 보고 적었는지 내가 불러줬는지 기억 안난다.>
그런데 그 많은 상인들을 상대로 외상은 거의 다 기억한 것 같다.
당시 장사는 외상이 많았다 떼먹는 사람 천지였겠지.
그럴 때 대체로 당시 유행한 말이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나도 그 말들을 기억한다. 내가 보기엔 경상도 사람이 더 많이 떼어먹은 것 같은데, 사람들은 동향인 보다 외지인을 표적으로 삼기가 더 쉽기 때문에 늘 그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독재자의 지역차별정책과 연관이 있겠지....
배운게 없지만 총기는 있었다. 그리고 생활력도 있었고 자존심도 상당히 있었다.
당시 하는 말로 "첩"으로 인생을 살았지만 나름 당당히 자신이 주도하며 살았다 생각이 든다.
언젠가 숨켜둔 사진을 봤는데 아버지와 신식 결혼식 하는 사진이다.
평생 원이었겟지. 첩이 아니라 당당한 정부인이 되는 것이.
난 화를 내었다.
“이런 걸 왜 만들어요!”
“잔소리 하지마라!”
우리 대화는 이 두마디로 끝이었다. 나는 우리가 있는데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그 사진은 언젠가 없애버린 것 같다.
아쉽다. 그 사진이야말로 엄마가 처한 당신의 삶과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다.
조작한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환경과 소망이 모두 다 담긴 증거물이다.
생전에도 찾아봤고 돌아가신 뒤도 찾아봤지만 없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 잘 모셨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어머니 아프시자 집으로 모시고와서 큰어머니도 잘모셨다. 난 직접 듣진 못했다. 언젠가 엄마가
“ 내가 다 잘못했다. 너 한테 함부로 했다. 그리고 참 고맙다. 새끼들 다 잘될거다”
라 큰어머니가 말씀 하셨다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화해했다고.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아프기 시작할 땐 날마다 방에 들어가서 큰엄머니를 씻겼다. 몸을 젖은 수건으로 딱고 마른 것으로 다시 딱아 깨끗하게...
그러다 얼마 뒤 큰어머니 돌아가셨는데 당시 폐병 비슷했다. 엄마는 그 누구도 방에 못들어오게 하고 혼자 들어가셔서 임종을 지키고 마무리 하셨다.
당시는 사람들이 다 집에서 죽었다. 엄마는 혹 자식들에게 페병이 옮길가봐 걱정되어 혼자 임종을 지킨거다.
당시 친구 수성이가 절에서 내려왔을 때 였다.
그래서 수성이하고 집에서 큰어머니 49제를 지냈다.
막제 때는 형님도 참여했다.
큰어머니는 신당을 모셨다. 이전엔 점집에 가면 볼 수 있는 제단인데, 지금은 거의 안보이는 것 같다. 가마 같은 것인데 제법 컸다. 기억엔 가로 2미터 세로 70센티 ~ 1미터는 족히 넘었던 것 같다. 덩치가 있으니 이사갈 때 마다 이게 좀 골치다. 주인이 용납안할 수도 있고 차지하는 것이 크기에 이것도 고려해야한다.
큰어머니 힘이 다떨어지고 이제 관리 어려울 때 당시 결혼은 안했지만 미래 장모님께 의논 드려 이것을 내가 태웠다. 약간의 격식은 차렸다. 장모님이 이 쪽 분야에 전문가라서 가능했던거다.
당시는 나도 이런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믿는 편이라서 그냥 태우는 것은 두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어머니가 화 입을까봐 평생 버리지 못한 신당인데 내가 어이 그냥 없앴겠나! 어떻게 했는가는 모르겠지만 시키는대로 주문을 말하고 빌고 하면서 태웠다.
글을 적다 보니 옛날 블로그에도 이걸 올린 것 같다.
그래도 그냥 계속 쓴다.
이제 윗분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정부인도 없다.
엄마는 여전히 동거인이다.
어이해야 할까?
우리 부부는 머리를 굴리다가 엄마한테 우리가 양자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남자 성”을 따르니 남자의 양자가 아니라서 성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구청에 가서 신고하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란다.
난 우리 가족 사정을 설명했다. 진짜 엄마인데 방법이 없다고 그래서 이 방법이 좋을 것 같다고.
구청이 받아줘서 드디어 이제 나와 내 엄마는 같은 호적에 올라갔다.
물론 형제들과는 이제 호적상 남이 된거다.
엄마 돌아가시고 작은 누나 아들놈(친조카)이 회사에 증명서를 보내는데 자기 할머니란 기록이 하나도 없는거다.
엄마를 찾으니 할머니가 다른 사람이름이다.
나도 가족 관계를 떼는데 과거 기록이 없다. 누나하고 내가 남매라는 증거가 없다.
동사무소 직원이 머리를 낸다. 옛날 아버지 호적을 떼 보라고
그곳엔 누나하고 내가 남매인 것이 나온다.
이것을 가지고 회사에 설명하라고 했다.
남아 선호 사상,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옛어른들의 사고와 시대적 상황에서 생긴 현대사의 모습 중 하나라고...
조카는 그냥 결석 처리하겠다 한다.
4녀2남(사망자 제외: 남2 큰어머니 소생, 녀1 울어머니 소생). 위에 2녀는 큰엄마 소생, 작은 누나와 형 동생은 엄마 소생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싸운 적이 없다. 내가 잠시 까탈스럽게 군 것은 그야말로 잠시다 1년도 채 안갔다. 나도 누나들을 좋아했고 누나들도 나를 좋아했다.
가슴 아프기로 치면 누나들이 더했을 거다. 갑자기 어떤 여자가 들어와서 엄마라 해라카니 엄마 소리가 나왔겠나. 엄마는 그게 또 썹썹한거였고...
엄마는 모두 결혼 시켰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뭐 그리 잘했겟느냐만은 최대한 할 수 있는 최선은 했을거라 생각한다. 그게 엄마의 성격이었으니..
난 누나들과 여동생이 자식으로 일정 가질 것을 못가져갔다고 늘생각한다.
형과 나는 부모 만든 재산 중 일부를 받았다. 그래서 출발부터 집을 가질 수 있었고 이것 때문에 집없는 사람 보다 덜힘들게 살았다. 가정이 묘하게 꼬여 있었지만 부모 잘만난 거다.
과거를 따져서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다.
때론 욕심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을 땐 현재가 잘안보인다. 그래서 현재 과한 욕심을 부리고 공평성을 잃는다. 난 그게 너무도 싫다. (남들은 이해 못할 말이지만. 다 말할 순 없다.)
친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다시 엄마 이야기다.
생전에 우리가 간 거의 모든 곳에 엄마를 다 모시고 갔기에 어딜 가든 엄마가 떠오른다. 대체로 갓던 곳에 많이 가니 마눌님도 시엄마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부족했겟지만 우리 부부는 엄마에 대해 아쉬움은 거의 없다.
마눌님은 자기 엄마 보다 내 엄마와 더 살았다. 장모님이 우리 결혼 하고 10년 뒤 돌아가셨고, 그 뒤 내 엄마는 30년 정도 더 산 셈이니..장모님과 30년 내 엄마와 40년을 산 셈이다.
마눌님의 지극정성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효부상을 받아 매우 마땅하지만 추천하는 사람이 없네.
돌아가신 뒤 다음 해 생신 날 엄마가 게셨든 금정요양원에 생일 떡을 보냈다.
엄마 주변을 마무리했다.
<사진의 할매 모습이 영판 우리 엄마다. 머리도 저랬다. 다리도 야위고 비틀렸다. 걷는 것도 비슷하다. 맨 아래 왼쪽 사진은 똥지저기 생각이 난다. 똥을 항거 사서 아래가 축쳐진....
최원락의 "종이 유형의 신회" 부산국제사진전, 석천홀 에서>
친구아버지는 젊은 여인 사진(친구 어머니- 돌아가신지 오래 된 건 아니지만 배우 같은 멋쟁이 때 사진이 있다)이 있는 상석 아래 흙으로 들어가셨다.
관리인이 호출해가면서 인사를 시킨다.
나였으면 멀리 있으라 했겠지.. 그냥 우리 알아서 절하고 이야기 나눴겠지...
‘유세차.......“ 읽는다.
내 같으면 한글로 오늘의 의미를 읽고 말하고 싶은 사람 말해라 했겠지...
뭐 각자 자기 생각으로 사는거니..
아버지 의례를 치러는데 난 여전히 내 생각으로 궁시렁이다.
하늘은 맑다. 비록 한가위 전에 운명을 달리하셨지만, 짧은 순간이었기에 큰 고통은 없어셨을거다.
하얀 눈썹에 멋진 얼굴, 얼굴에 머문 미소가 떠오른다.
극락이 없으니 왕생극락하란 말은 못하겠다.
편히 가셨고 새끼들 다 건장하니 이제 자연으로 잘돌아가셨단 생각을 한다.
근심은 끝났으니 이 또한 행복한거라 위로 하면서....
이 글 끝나는 순간 카카오스토리에 글이 올라 있다.
친구의 글이다 같이 올린다 허락받은건 전혀 아니다.
아버지가 어머니 곁으로 가신 날..
한가위 바로 앞날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우리 나이로 86살인데 여태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사를 하실 만큼 정신도 멀쩡했고
몸 관리도 잘 하셨다.
서너 번 쓰러진 적은 있었어도
어머니 못 산 것 만치 더 살거라 하시더만
어이없이 가시고 말았다.
상중에 가까이 지내던 분들이
함께 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참 잘 사셨구나' 싶었다.
자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부조였다.
'나도 아버지만큼 잘 살아야 할 건데..' 라고 되뇌여도 당신만큼 살지는 못 할 것 같다.
아버지한테 진작 이 말을 못 했다..
(추석 연휴고 코로나 시절이라 일일이 부고를
못 알렸습니다. 널리 양해 바랍니다.)
잘산다는게 뭔지... 나는 종종 헷갈린다.
요사인 내가 이제 더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자주드니 더 그렇다.
눈에 밟히는 것들이 몇가지 있어서 살긴 더 살아야하는데 이것도 욕심이 아닌가는 생각들로 좀 혼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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