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05(월) 위대한침묵(국도)
‘만약 같은 종교였다면 오랫동안 한 장면을 길게 보여주고 그들의 머리 숙인 모습을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겠지?
만약 절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면 우리 가슴에 확 와 닿았지 않겠나?’ 바깥아내의 이야기다.
침묵을 지키는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내 영화 목록에 올리지 않았는데 영화 한편 보고 조금 걷기를 원하는 바깥아내의 소원을 들어줄 시간대는 ‘위대한 침묵’과 양푼이 국수 한그릇, 그리고 이기대 걷고 집에 가서 짐챙기고 용학이 형 집 저녁먹으러 가면 시간은 매우 빢빡하지만 할만은 하겠다 싶어서 선택한다.
와 길다. 168분 영화관 들어가서 조금 기다리고 엔딩에 머무적 그리다 나오는 시간 계산하면 180분 3시간이다. 음악도 가끔가다 나오고 말소린 거의 없는 3시간. 그들이 수행하는 것인지 나의 수행을 그들이 지긋이 기다려 주는 것인지 주객이 혼란되는 영화. ‘위대한 침묵’ 아무리 좋은 영화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별로다. 내 허리와 엉덩이에 대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와 저런 수행을 택할까?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하는 마음. 그것이 침묵으로 이루어지는가? 우짜다 한번씩 밖으로 나갈 때 보여주는 천진난만은 누구든 그리워하는 유희가 아닌가? 고등학교 때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스님께서 ‘용맹정진 들어간다’시면서 끝날 때 까지 침묵을 해야한다고 얘기 할 때는 ‘수행자는 당연히 그래야지 말이 뭐 필요하노?’ 라 생각했지만 이리 긴 침묵은 징그럽고 숨막힌다.
종교가 가지는 탐욕을 너무 많이 봐서 이제는 종교에 아무런 마음이 닿지 않지만 소박과 최소한의 움직임과 음식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수행자는 다르지 않는가? 그들의 움직임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많은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존경할 만한 시도들 아닌가? 억지로 갔다 붙이면 무위도식한다는 것과 끝없이 인류에게 이리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요하면서 저항성을 약하게 만드는 또 다른 앞잽이의 역할을 하지 않는가? 라고 하면 맞아 죽을란가?
백장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부식’은 어느 시대이던 귀감이 되는 아이콘이 아닌가? 나처럼 컴만 만지작 그리면서 사는 사람도 일일유작에 해당될련가?
그들의 발자욱 소리 절기 마다 찾아드는 계절의 소리. 자연과 하나되어 버린 기도원의 정경들 침묵 자체를 대화로 받아드리면 황홀한 기운들이 가슴에 가득할 영화. 다시 보기엔 좀 그렇지만 한번 보시길 권하고 싶은 그들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