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순동, 강재봉과 저녁을, 과거를 기념하는 자리에 낑기다.

무거운 빈가방 2020. 6. 13. 01:49

강도사에게 전화가 왔다. 매실 씻고 말리고 한 그릇과 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톡을 안읽어서 전화 했다고... 저녁에 저녁 먹자고. 정순동 샘에게도 연락 드렸다고...

구서전철역 앞에서 회를 먹을거라고..

 

밥은 먹고 갈거라 했다.

 

강도사는 모두 다 잘알다시피 학교에서 4번이나 쫓겨났다.

부산에서 최고 기록이고 전국에서도 손가락 꼽힌다.

공항 옆 <대저고>에서 복직하면 껀수 잡아 쫓아내고를 반복했다.

 

<대저고> 이사장 동생과 같이 연수 받은 적 있다.

기공있을 때 상담 교육 받고 싶어서 남에게 배정된 것을 뺏다시피하여 내가 갔다. 내게 연수를 순순히 넘겨 준 선생은 땡잡았다. 왜냐면 그 날이 개교기념일 이었고 난 전혀 몰랐으니. 쉴 수 있는 12일을 내가 대신 간 샘이다.

그 곳에서 당시 교감인 이사장 동생을 만났다. 난 윤경태님이 잘쓰는 탐나는 이름 <부싯돌>을 예명으로 섰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싯돌이라 안하고 <성냥불>이라 했어야 어울렸다. 내 당시는 제법 중요햇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사용할 이유도 없는 것도 똑같으니...

 

 그도 나도 참 열심히 했다. 이 이야기는 왜 하냐고? 저리 열심히 하는 열정적 선생이 사립관리자일 땐 전혀 다른 이로 돌변한다. 세상에 복직한 교사를 3번이나 더 쫓아 내다니! 그가 직접적 연루되엇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상담하는 것처럼 저거 형한테 같이 해 보도록 하입시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라면서 강선생을 안을 수도 잇지 않았겟나! 사립은 이게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사립은 교육 기관이 아니라 대체로 재산 축적과 비리 덩어리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덩어리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한다면! 사람을 완전 왕다 시키거나 쫓아내는거다.

 

처음 강도사를 만났을 때 지부 사무실이고 혼자 책상 앞에서 법전을 뒤지고 있었다.

동창 고재명(죽었다. 지부에서 내 동기는 다 죽었다.)이 당시 사무국장인데 물어보니 해직되어서 찾아 왔다고 한다.

난 당시 지부 소식도 아니고 해직관련 담당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건을 내가 맡으면 안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당시 담당은 같은 재단에서 해고된 이상균 선생(입사 동기이고 학생들이 학교 횡포에 못참고 데모를 했다. 이 선생은 주동자처럼 덮어쉬고 여중으로 쫓겨났다. 난 그 때 아이들이 왜 데모하나? 라는 생각으로 쳐다보았다.)이다.

둘이 합의하에 강선생 사건을 내게 넘겼다.

 

그 때 난 아마 내가 맡아야 정순동형과 같이 의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순동형은 전교조 해직자가 아니라 <덕원공고> 투쟁 해직자였기에 지부와 약간의 벽이 있었던 때 였다. 난 예나 지금이나 그런 벽엔 관심이 없었으니....

 

 

 강도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와는 여러 가지 연으로 얽혀 버렸다. 그는 나 덕분으로 학교생활 잘하게 되었다 하고, 나는 그 덕분으로 좀은 넓게 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없어도 복직하여 잘살았을 것이고 지금 존경해 마지않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모두 다 친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의 천성과 행동들이 그리 만들었을 것이니...

단지 난 그 때 그 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강도사는 가끔 복직의 은인이라 하는 순동형과 나를 부른다.

 

해운대에서 상석형과 만남이 끝난 뒤 집에 오니 TV에서는 한참 6.10 항쟁에 대한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이한열의 순간이 나오고 있다.

죽일 놈의 전두환이 큰소리 치면서 살고 있는 세상이고, 그것을 미친 듯 지지하는 일베와 영감들이 개활개치는 세상이다. 동시에 과거의 아픔과 투쟁을 묵념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움직이는 세상이기도 하다.

저녁을 오뚜기 비빔면으로 마눌님과 먹고 횟집으로 내려갔다.

 

두툼한 회껍데기가 잘살아있는 머시라카는 고급회 이다.

난 이미 배부르니 대충 젓가락만 올린 듯 하다가도 제법 먹는다. 내 식탐도 장난 아니니...

강도사는 오늘이 무슨 날인가 묻는다.

6.10 만세 6월 항쟁 일...

89년도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일 이라고 한다.

, 610일 결성했구나. 내겐 가마득한 세월이고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고 전교조와의 연이 거의 없으니 모든 것을 까먹고 살았다.

강도사는 결성일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니 자연 우리가 떠올라 한끼 하자고 했단다.

 

몇 번 해직을 반복하다 보니 열이 나 있었던 강도사는, 전국에서 잘못된 법 때문에 해직된 사람들을 정부 차원에서 구제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자기는 민사를 걸었기에 법을 통해서 들어가겠다고 잠시 버티던 시기였다.

둘이서 지리산에 간다고 길을 나섰다.

칠선 계곡 쪽으로 하여 올라가는 코스인데 아무튼 힘든 코스다. 지금은 가라면 안간다.

난 그에게 둘 다 하면 안되나?라 했다. 민사는 민사고, 정부차원 복직은 복직이고....

산청휴게소 쯤인가에서 그는 마음을 돌렸다.

당시 담당자인 남광우(그 당시 불발이라 불렀다. 발령 자체가 안된 사범대 운동권들 중 한명이고 능력이 뛰어나 사무실에서 근무했다.)에게 전화 하여 자신의 뜻을 알렸다.

등정은 어두워질 때 가지 했고, 산 꼭지에서 물가로 가는 길을 몇 번 지나쳐 고생 좀 한다. 밤에 밥먹고 술한잔 하고 커피 마신다. 난 커피 잔을 들고 졸다가 커피를 쏟으니 강도사는 커피 마시면서 조는 사람 처음 봤다고 웃는다.

<산행 이후 백숙으로 마무리... 그 댄 백숙 참 많이 먹었다. 흐뭇해 하는 저 표정!>
< 이거 먹고 난 뒤 커피 마시며 조분 것 같다. 뺑뺑이 돌리니 피곤할 수밖에 ㅋ>

<비박 모습 - 선녀골로 올라간 모양>

 

<사무국에서 나는 국장 남광우는 간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뜨거웠던 1989년 후반기에. 난 일이 뭔지도 모르는 얼간이 였지만, 얼간이들이 흔히 자신을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아는채 하면서, 말로 사람 상처를 잘주었던모양. 지금도 좀 그렇지만. 광우는 그 때 화가 많이 났는데 내가 즉석에서 사과하자 진정성이 느껴져 받아들였다고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 한 것이 기억난다. >

 

 

<이상균 선생은 내가 전교조로 가는 길목에서 큰 역할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당시 교협 활동가인 이헌룡을 소개해 준다. 그로 부터 여러 전단지를 받았다. 읽진 않앗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교협 연수 때 참가했다. 그질로 빠지기 시작한다.> 

 

 

강도사는 하산한 뒤 서울로 올라갔다.

순동형은 이미 올라가 전국 2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과 토론 하고 방법 모색하고 대상을 찾고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도사의 서울행은 강도사 투쟁 인생에 가장 뜻깊고 의미 있는 날들이었단다. 전국구로 자리매김하는 시간들이었고, 세상에 넘쳐나는 억울한 해직들을, 전설들을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손잡고 노래하는 시간이었다.

무한히 쪼그라들기만 하는 나하곤 반비례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는 비로소 진정한 교사가 되는 길을 그는 스스로 찾아갔다.

 

세명이서 만나면 난 할 말이 없고 두사람이 줄기찬 이야기를 쏟아낸다.

특히 순동형은 어마무시한 내용들과 기억들이 있기에 아는 내용 조금에, 새로운 것 항거 마구 흘러나온다. 완전 샘쏫는 물이다. 마르지 않는다.

이번엔 과거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함을 한탄 하면서 이야기 하신다.

 

난 우연히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동아대 연설 사건이 생각났다.

당시 김선생은 공립이고 난 사립이다.

공립은 잘못 걸리면 구속이다. 조상희 선생이 구속 중이었다.

내가 덩치 있는 것도 아닌데 김선생 보디가드 비슷하게 그를 따라 동아대에 갔다. 학생들이 모여 투쟁의 장을 펼치는 날이었다.

김선생은 구속될 수 있으니 사립인 내 보고 단에 올라가 연설해라 한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운동권도 아니고 무슨 큰 뜻이 있어서 전교조 가입한 것도 아니다. 지랄 같은 학교 환경을 약간만이라도 바꿔 편해 볼라다가 여기 까지 왔는데..(우리 둘 다는 해직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래도 동지가 구속되면 힘들다.

그래서 뭘 이야기 하란 말이고?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교육이 유다스 양과 같은 모습이다. 유다스 양이라 말을 이 때 처음 들었다. 이후도 들은적은 없지만.

                       <대단한 활동가, 김영준 선생하고도 몇가지 인연이 겹친다.>

 

김선생이 자기가 준비한 연설을 나에게 쭉 이야기 해준다. 나는 받아적으면서 요약 정리

B4용지 두장 정도 된다. 대운동장 연설대에서 히는 것이라 글 작으면 안보이니 사인펜으로 큰 글로 적으니.

 

남들 앞에 연설해 본 적 없는 나에게 첫경험은 천명 가까이 되는 대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일반인들 앞에서였다.

당시는 정부가 모든 운동을 심하게 타압하던 시절이었고 여러 부문의 운동들이 동력을 잃어가던 때였다. 전교조의 출범은 운동에 활력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단결을 모색하게 되어 모두 고무되어있었다. 엄동설한 대노동 탄압기의 시기에 정부는 더욱 더 강하게 탄압하던 시절이었다. 백골단이 활개치고 걸핏하면 해고 시키고 감옥에 가두는...

 

난 이런 때 아무 준비도 이론도 생각도 없이 대타로 군중 앞에 섰다. 그리고 읽었는지 연설 했는지 2장을 빠짐없이 토했다. 김선생의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양 바뀌어 스스로 고무되고 격앙되면서.

우뢰 같은 박수를 받고 구호도 멋들어지게 하고 내려왔다.

 

지금 진구청장인 <서은숙>은 당시 부산여대 총학생회장이다. 그도 무대에 올라 연설한다. 비쩍 골아서 짝대기 같은 아이의 목에서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호소는 내 심장을 울리고 다른이에게도 같이 울렸을 거다. 내 다음으로 연설을 잘했다. ㅋㅋㅋ 지금도 그를 보면 당시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잊어지지 않는다. 나에겐 늘 풋풋한 여대생이다.

 

두사람의 옛 이야기 속에서 난 내 이야기가 떠올랐을 뿐.

두사람의 과거 이야기는 지금에선 즐겁지만 당시는 늘 가슴 졸이고 생사를 다투듯 살았기에 긴장이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강도사는 복직 위한 모임 한달의 경험이 인생 절반의 경험과 같다고 한다. 어마한 시간이었을 것이고 그도 그 이야기를 하면 엄청 고무되었다. 순동형은 덕원공고 투쟁 부터 다른 학교 투쟁의 조언 그리고 이후 취직한 회사에서의 활동 등등등.. 엄청난 경험과 변화들을 겪었기에 내용은 무궁무진하다. 긴세월 참 많은 이야기 들었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사람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박머시기 조머시기 황머시기 경희여상, 한 때 투사들이었으나 지금은 어디서 뭘하는지 모르는 사람과 죽은 사람 아. 다 죽어버린 내 동기들..(정말 몇안되는데.. 점잖았던 고머시기, 음악선생이라 믿기지 않는 안머시기, 다른 안머시기.)

 

초대지부장 권경복 형님의 재판정에서 판사와 방청석에서 소리치며 저항하다 판사는 재판 진행 안하고 소리지른 사람 나오리고만 했단다. 여러차례 그러자 소리친 윤머시기 대신에 황머시기가 지가 했다 나오고 판사는 바로 구류 7일을 두드렸단다. 이름을 발표하면 언제나 맨 앞에 이름이 나오는 강갑머시기(ㄱ ㄱ 이니 가장 앞이다)는 바로 판사에게로 달려가고 다른 여교사들도 달려가니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되고 당시 변호사인 문변(현대통령)은 진행과정 없는 구류 7일 판결은 불법이라 이야기 하고...

 

그자리에 나는 없었으나 당시 재판정 그림이 그려진다. 조상희선생 재판 때 단아한 목소리로 최후 진술한 말과 분위기도 동시에 떠오른다. 그 대 변호사가 흥만형의 형이었지 아마...

경복형 면회 갔을 때 당당히 웃으면서 하던 말도 기억이 난다

조상희 경찰서 면회도 기억이 나네.. 모두 잊고 살았던 한 때.

우리는 모두 뜨거웠고,

 

전기불 조차마음대로 못켜는 학산여고의 실정을 불만이라도 켜는 학교를 만들려다가, 이런 얄랑궂 활동이 무슨 저항이 되고 정치 까지 바꾸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없는 서글픈 현실을 알게되고...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불켜는 것도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희망이란 상상으로 살았던 시기. 어쩔 땐 절망하여 분노조차 힘들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고 싸웠던 시기.

내겐 다 꿈같은 일이다.

모두들 계속 이어졌으나 난 스스로 내 힘을 내려놓고 무장해제 했다.

학교도 그만 두고 모든 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늘 가까이 있는 강도사 덕분에 모든 것이 조금은 유지되었을 뿐! 여기엔 용학형을 절대 뺄 수 없지만 오늘은 용학형 이야기하는 자리는 아니니. 모든 공은 강도사에게로!